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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Sep 26. 2021

페라라에서

다시 가고 싶은 이탈리아

마지막 이탈리아 출장이었다.  전 하루가 비었,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 피렌체 결정. 아침 일찍 피곤한 몸을 추스려 피렌체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생각했다. 30분 쯤 후, 녹인 초콜렛처럼 귀에 달라붙는 이탈리아어의 일부가 내 귀에 꽂힐 때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동화 같은 풍경을 멍하니 감상하던 나는 화들짝 놀라, 멀어지는 지난 역의 표지판과 노선도를 비교 내가 탄 열차가 피렌체의 정반대, 베네치아를 향하고 있단 걸 깨닫는다. 구글맵, 아니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 이야기다. 나는 이태리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이태리 기차역엔 영어가 부재했고, 베네치아까지 갔다간 이동에만 3시간 정도 걸릴 것이었으므로 일단 다음 역에 내리기로 했다. 곳이 바로 페라라였다.


기차를 내리면서 다시 피렌체 행 열차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플랫폼에 내리니 시간이 아까웠고, 사실 그 전의 방문에서 피렌체에 그닥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 당시 <냉정과 열정 사이>란 소설이 베스트 셀러였는데, 거기에 피렌체의 두오모가 나온다. 오랜 시간, 서로 그리워하연인이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낭만의 장소로. 그러나 그곳이 소설과 같았던 건 단지 높았단 것 하나 뿐으로, 힘들게 올라갔는데, 사람은 북적북적, 어둡고, 시끄럽고, 보수 때문에 안쪽에 세워놓은 나무 판에 지저분한 낙서가 온갖 언어로 휘갈겨져 있어 이게 대성당인지, 할렘 지하로지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한국어도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두오모 꼭대기 석벽에 아주 작은 글씨로 '사랑해'라고, 대상의 이름도 없이 쓰여 있던, 매우 사연 있어 보이는 세 글자. 그게 피렌체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이 됐다.(...문화재에 낙서를 하면 안됩니다.)


페라라에 대해 아는 건.... 체자레와 열정적으로 싸운 후, 열정적으로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영주 카테리나 스포르차 뿐.(당시 시오노 나나미가 인기였다.) 어쨌든 도시 국가였으니, 성이나 두오모나, 뭔가 볼 게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동네 한 바퀴 돌지 뭐. 사실 난 동네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렇지 않게 려 있는 빨래나, 식료품 가게에서 안부를 나누는 이웃들, 정원에 심어 놓은 꽃들과 길가의 들꽃, 우체부, 아이들이 노는 모습, 밥 하는 냄새... 그런 것들이 좋다. 그게 이국적 동네라면 더할 나위 없. 마음을 정하고 출구를 찾는데, 매표소에 붙은 광고 포스터가 눈에 띈다. 세상에, 클림트의 '여자의 세 시기'를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한다는 듯 하다. 저 그림 하나 보면 오늘 하루가 꽉 차겠군, 하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역을 나선다.


아, 그런데 나는 길치다. 항상 왼쪽 오른쪽이 헷갈리고, 동서남북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어떤 자발성, 굳이 길을 잃고자 하는 마음이 더해진다. 대로보다 골목을, 직진보다 우회를, 그러니까 나는, 우연히 어딘가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타입이다. 이거야말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훌륭한 케이스. 나는 어디선가 획득한 지도를 가지고 어슬렁 어슬렁 페라라라는 예쁜 이름의 동네를 걷는다.


봄이었지만, 약간 땀이 나는 날씨다. 이상 기온이라고 했다. 어느 골목엔 새하얀 꽃이 가득 떨어져 있었고, 에메랄드 빛 잔디가 돋아난 공원에는 피크닉 나온 어른과 아이들이 눈에 띈다. 그러고보니 주말이었다. 공기 중에 느슨한 설렘이 묻어있다. 눈에 띄는 젤라또 집에 들어가 힘들게 두 종류를 고르자 젊은 남자 직원이 컵 or 콘 or 컵 or 콘? 이라며 반쯤은 무례하고 반쯤은 익살스러운 장난을 친다. 천천히 레몬과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핥으며 나는 결국 미술관에 도착했다. 약간 어둡고 시원한 실내. '관'자가 들어가는 건물들의 이런 온도와 조도, 냄새가 좋다.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오래된 것들이 휴식하는 듯한 냄새.


아무 준비도, 의도도 없이 그림들을 바라 본다. 마음에 드는 건 오래, 별로인 건 잠시, 내 맘대로다. 그리고 마침내 클림트의 그림 발견. 그렇게 큰 그림인 줄은 몰랐다. 거의 전신상에 가까운 그림은 세 명의 여자를 그리고 있다. 셋의 이미지는 친절하지 않은 구도로 병렬돼 있는데, 아름다운 흰 피부의 젊은 여자가 가운데 정면으로 서 시선을 모은다. 붉은 기가 도는 그녀의 금발은 알록달록한 데이지로 장식돼 있다.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도취된 표정이다. 여자의 품엔 아기가 안겨 있는데, 촉촉한 밤색의 머리에 붉은 볼과 입술을 하고, 어린 동물처럼 잠들어 있다. 젊은 여자의 뒤 편에는 시체같이 피부가 검은 늙은 여자가 아름다운 두 인물과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모로 서서 비탄에 젖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 판촉물 같은 데선 종종 잘려 나가기도 하는 인물이다. 샴페인의 거품처럼 환상적인 작은 빛들이 위로 떠올라, 결국 죽음처럼 막막하고 깨끗한 검정의 공간에 닿는 배경. 셋은 그 커다란 화면 중앙에 몰려 있지만 서로 관계 없다는 듯, 각각의 감정에 잠겨 있다.


저 늙은 여자는 젊은 시절을 후회하는 걸까? 젊은/어린 인물들은 연상의 인물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성을 가진 것은 그녀 뿐인 듯 하다. 나는 그 출장이 끝나고 얼마 후 결혼해 호주로 이민을 가게 돼 있었다. 해외에서 산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영어를 전공으로 택한 건, 문과에서 가장 취업이 빠르고 쉬워 보였기 때문이고, 호주에 간 건 전공 공부의 연장에서,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였다. 호주 남자를 사귀게 될 줄은 몰랐고, 결혼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민이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향처럼 느껴졌고, 그저 모든 게 잘 풀려 나가리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 인생의 중심에 있었고, 그럴 땐 모든 게 좋게 생각되는 법이다.


돌아오는 길 저녁으론 지독히 맛이 없는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먹었다. 아무리 본 고장이라도, 역 앞 음식점이 맛없는 것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었다. 페라라는 내가 방문한 유럽의 마지막 도시가 됐다. 출장이 잦았던 직업의 나와 신랑은, 허니문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결혼이 해소되기까지 결국 허니문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페.라.라.

그 예쁜 이름과, 오래된 포도에 레이스처럼 깔려 있던 하얀 꽃들을 기억한다. 이상하게도, 클림트의 그림보다 그 장면이 머릿 속에 더 생생하다. 말했듯이 나는, 우연히 어딘가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타입이고, 그래서 종종 길을 잃는다. 거기서 발견하는 것들은 물론 무지개 끝에 숨겨진 보물 상자 같은 건 아니고, 처음 보는 들꽃이나, 모르는 어린애가 풍선을 안고 지은 웃음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이런 인간이 과연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지. 돌아보면 결국 기억나는 건 무엇일지.

 

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 plans.


그러니, 내 손을 잡아요.  *






--

*Darling Boy- John Len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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