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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May 06. 2021

꿈에 나온 여고 동창

새침했지만 다정했던 그녀.

꿈에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왔다. 교복을 입고 우리는 학교 화장실에 있었는데, 친구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새침과 음침의 사이 어느곳엔가 있었다. 왠지 다른 교복보다 색이 약간 짙어 보이는 회색 자켓 아래 목이 올라오는 얇은 잠바를 받쳐 입고, 교복 치마에 손을 넣은 그대로였다. 치마 아래엔 체육복 바지도 입고 있었을지도.... 중학교 때 같은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고등학교도 3년 같이 다녔지만, 절친까진 못됐고 그래도 복도에서 얼굴 보면 오래 수다를 떨었던 친구.


이 친구는 조용하게 야 이년아 라며 뼈 때리는 말을 시전 하는 게 특기였는데, 뭐랄까, 목소리가 진흙 같달까, 은방울처럼 낭랑하진 않지만 듣다 보면 푹푹 빠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약간 긴 턱 위로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한 그 애에겐 언니가 있었던가. 여학교에는 그런 아이들이 있다. 남들보다 언니력이 높은 애들. 그 애의 언니력은 최신 연예 정보나 패션에 능통한 게 아니라, 아주 약간의 엄마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뼈 때리는 말로 야단을 쳐 주기도 하지만, 하는 말마다 공감의 질이 높은 것. 그것이 생리 얘기든, 도시락 얘기든, 담탱이 얘기든... 적당히 우울하게도 들리고 적당히 공평하게도 들리는 냉소적인 이야기 끝엔 항상 교복 타이를 정리해 준다던지, 단추를 끼워 준다던지 하는 약간의 우쭈쭈가 있어서 상대를 약간 수줍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언니력. 등짝을 맞아도 손 끝이 둥근 듯한 느낌. 그 친구에게 나는 굉장히 여자답단 느낌을 받았는데, 내게 있어 여자다움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나 '코스모폴리탄' 이 아니라, 집에서 사랑도 받고 구박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굳이 말하면 '마당 깊은 집'이랄까. 남자들은 그런 느낌 알려나. 약간의 체념 같은 것도 있고, 따뜻함도 있고... 진흙 위로 흐르는 빛나는 물 같은 것. 밟으면 부드럽고 잠시 더러워지지만 이내 다시 맑아지는..


화장실에 왜 갔냐면, 물론 볼 일을 보러 갔다. 첫 칸이 너무 더러워서 열어 보고 나왔는데, 친구와 마주쳤다. 내가 야, 오늘 화장실 왜 이렇게 더러워?라고 했더니 친구는, 너무 더러워서 내가 저 칸 청소해놨다. 들어가 봐, 깨끗하지?라고 했다. 들어가 보니 과연 깨끗했고 친구는 문 밖에서 나는 문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생의 자극(...)이 와서 깼다.


깨고 나니 졸업 후 한 번도 못 본 그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 친구는 김이박은 아니지만 희성도 아니고 이름도 '미'자가 들어가는 흔한 이름이라 페북에서 찾을 순 없으리란 느낌이 들었는데 과연 그랬다. 프로필 사진들을 넘기며 그 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봤는데... 그냥 뭐든지 납득할 것만 같았다. 군인 아내가 되어 아들 셋을 학교 보낸 후 사택에서 김치를 하든, 독신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가든, 어디 폴란드나 말레이시아 같은 데로 이주했든 여전히 그 애의 특유의 새침하고 단정하고 다정한 모습을 잘 지켜가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뭐가 됐던 그 친구는, "야 이년아 니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싱긋 웃으며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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