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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Jul 15. 2023

Welcome to Your Life

이혼의 BGM

클래식 라디오를 틀어 놓고 공부를 하다보면 정신이 확 깰 때가 있다. 바로 결혼 행진곡이 나올 때다. 결혼식,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이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 이혼을 생각했을 때, 결혼식장에 모셨던 분들의 얼굴이 머리속에 지나갔었다. 그 분들 앞에서 맹세를 했었지. 상대 뿐 아니라, 그들과도 약속을 했던 것 같았다. 그래, 그 때 그렇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 드렸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을 했을 때를 생각하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 어찔하다.


사랑 얘기든 이혼 얘기든, 남이 하는 걸 보면 너무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내가 겪으면 그렇지가 않다. 사랑이 시작될 땐, 좋은 감정을 적립하다, 어느 순간 감정의 저울이 기울어지면서 아, 이건 사랑이구나, 깨닫는다. 그 계기는 단순히 햇빛을 등지고 웃는 그의 모습일 수도 있고, 한밤중에 온 따뜻한 문자 메시지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있는 그의 모습에 갑자기 심장이 덜컹할 때나, 사랑 노래에 그와 나를 대입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아. 깃털 하나가 저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탕, 하고.


때로 어떤 이들은 입덕 부정기라는 기간을 거친다. 주변에서 알아챌 정도로 이미 누군가에게 빠져 들었는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그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관성 때문일까, 아니면 변화가 두려워설까.


이혼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견디고 살아, 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저울이 기울어지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은 것 뿐일 수 있다. 내 경우엔, 너무 우울했던 나머지 도저히 안되겠단 생각에 카운슬러를 만났는데, 5분만에 당신은 이혼해야겠군요, 란 말을 들었다. 어이가 없어 다른 카운슬러를 찾는데, 그 카운슬러 역시 대뜸, 이혼 답인 것 같다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 또 다른 카운슬러를 찾았다. 그는 "이혼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고 말했고, 나는 그 카운슬러와 몇 달간 상담을 하다가 결국 이혼했다. 웃기죠.


상담이 천천히 나를 도와줬다면, 저울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두 개의 노래인데, 첫 번째는 Keane의 Bend and Break.

Meet me in the morning when you wake up 일어나면 아침에 날 만나요.

Meet me in the morning then you'll wake up 아침에 날 만나면 당신은 깨어날 거에요.

If only I don't bend and break 내가 꺾어지고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I'll meet you on the other side 당신과 만날 거에요, 세상 반대쪽에서.

I'll meet you in the light 당신을 만날 거에요, 빛 속에서.

If only I don't suffocate 내가 질식하지만 않는다면

I'll meet you in the morning when you wake 당신이 일어나는 아침, 난 당신을 만날 거에요.


브릿팝과 영국 밴드의 팬데도 Keane을 알게 된 건 2014년이 넘어서였다. 듣자 마자 꽂혔다. 호소하는 피아노와 이 후렴구에.


그에게는 불면증이 있었다. 그는 내가 출근하기 직전에나 잠들었고, 나는 아이를 캐어에 맡기고 출근해서 밤 늦게 들어왔다. 어린 아이의 부모는 외롭다. 아이내 물리적인 존재가 필요하지만, 감성적 교류는 불가능하다. 아이 아빠와도 비슷했다. 그와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아팠고, 자신을 위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그것은 오로지 그의 결정이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너무나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약 없이 잠들기 위해 그는 술을 마셨고, 공교롭게도 그가 샀던 가장 당시 저렴한 맥주는 한국산으로, 소주병 같은 녹색이었다. 알콜 중독인 아버지를 겪었던 내가 아침마다 감당하기엔 너무 혹독한 짙은 녹색.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꺾어지고, 부러지고, 질식하고 있었고, 마법이 일어나 그가 어느 날 아침, 밝고 환하게 일어날 수 있길 바랬다.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런 날이 오길 바랐을 때가 있었다.


또 다른 노래는 Grouplove 의 Welcome to Your Life.


We're back in business 우리 다시 시작이야.

You're such a big mess 넌 완전 엉망이네.

And I love you 그리고 난 널 사랑해.

Yeah, I love you 그래, 널 사랑해.

...

Welcome to your world, my girl. 네 세상에 온 걸 환영해, 우리 소녀여.

Let it be your fantasy, oh yeah. 이 세상이 네 판타지가 되게 해. 오, 예


이 노래는 특이하게 비즈니스, 딜 같은 말이 가사에 많이 들어가 있는데, 비즈니스라는 말이 뭔가 본격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어둡고 눅눅한 방에서 환하고 정돈된 세계로 나온 듯한. 중간에 Hey, here's a deal! 이라고 소리치는 부분은 꼭 재래시장 같다. 펄떡이는 은빛 생선이 훅 내밀어진 것 같은 느낌. 놓치지 말고 확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왔어요, 왔어. 기회는 찬스요, 놓치지 마시오. 아줌마도 아저씨도 골라 잡아!


출근하는 차 안에서 매일 울었던 적이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이대로 변하지 않는 하루 하루가 계속될 것 같았는데, 그게 견딜 수 없었다. 아침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차에 타면 그냥 울음이 나왔다. 마치 신이 날 때 콧노래가 흘러 나오듯, 그냥 크게 울다 작게 울다 하며 운전을 하는데,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힘든 시간이었다. 당시 내가 관리하던 학생이 자살했다. 학교를 졸업한 그 주 금요일에 목을 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그 아이 더 이상 산다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눈 뜬 순간부터 어깨를 누르는 중력과 맨살을 하늘하늘 감싸는 봄바람에 섞 칼날들. 누우면 천장이 코로, 입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 앤 이제 고작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것이, 앞으로 살 날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는 것이 숨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 아이는 너무 어렸다. 고통에 지쳐, 그애는 자신이 이미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열아홉이란 얼마나 싱싱하고 아름다운 나이인가. 믿을 수 없을만큼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분명히 생길 텐데. 그 기억 하나 오랫동안 사는 의미가 될 만큼.


그런데 노래가 끝날 때 쯤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 역시 어쩌면, 너무 어린 나이라고. 마흔이 되고 쉰이 돼도,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살아있면. 아니,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또 어때. 빠져 나오고 싶다, 이 생을 내가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얼마 후 꿈을 꿨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가라앉은 어둠을 보고 있었다. 어둠은 점점 커지고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수면 위로 솟아 올랐다. 그것은 거대한 고래였다. 연약한 물의 표면이 자잘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어느 축축한 가을 밤의 공기, 읽고 있던 잡지책의 매끈한 페이지, 얽혔던 손가락의 부드러움, 친밀한 대화와 미소 같은 것들을 일깨웠다. 그것들은 항상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내 영혼이었다. 나는 그것을 길게, 호흡과 섞어 내쉬었다. 나라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그 주에, 나는 카운슬러에게 말했다.


"사실은, 이혼을 생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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