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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cellaneous Sep 05. 2022

풋볼에 환장하는 미국인들

처음으로 미국 대학 풋볼 직관한 이야기

석사 1년 차 때에는 코스웍을 몰아서 듣느라고 상당히 바빴다. 학기 중에는 체육관 가서 운동할 엄두도 안 날 정도로 바빴었고, 당연히 첫 학기에 오픈한 풋볼 시즌 경기는 하나도 못 봤다. 


풋볼을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건, 한국에 있을 때도 야구장 한번 안 가봤을 정도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워낙에 없던 탓도 있었다. 게다가 풋볼 룰도 하나도 모르고, 풋볼은 동양인들이 합류하기엔 어려운 순전히 미국 백인들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어 내 마음속 진입장벽이 높았던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라고 항상 벼르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2022년 풋볼 시즌 첫 경기가 다가왔다.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어디랑 하는 경기가 재밌는지 등등 배경지식이 전무한 채 일단 맨땅에 헤딩해보자는 심정으로 티켓팅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풋볼을 좋아하시는 지인이 계셔서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조언을 듣다가 정신 차려 보니 풋볼 마니아를 포함한 4명의 한국인이 사이좋게 풋볼을 보러 가게 되었다.

경기장에 검은색 옷을 안 입고 오면 훌리건들이 제사상을 차려줄 것만 같았다. 


검은색 옷을 입고 와야 하고 큰소리로 응원해야 한다는 오늘의 룰에 따라서, 학교 티셔츠는 없었지만 검은색 옷을 챙겨 입었다. 경기 시작은 오후 8시였지만, Marching band의 공연을 보려면 좀 더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풋볼 마니아의 조언에 따라 경기 시작 1시간 30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다들 검은 옷을 입고 줄줄이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봐야 얼마나 드레스코드 맞춰 입고 오겠어?"

"다들 스포츠에 진심은 아닐 텐데 대충 입고 온 사람도 있겠지"


라는 나의 안일한 생각은 차에서 내려 학교에 발을 딛자마자 달라졌다. 캠퍼스 곳곳에 풋볼 경기장으로 가는 인파로 한가득이었고, 다들 하나같이 검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1년 동안 이 학교를 다녔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드레스코드에 맞춰 입은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간간이 보이는 흰색이나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오늘의 상대팀인 Penn State University 풋볼팀의 팬들이었다. 


Purdue의 경기장 이름은 Ross-ade Stadium이다. Ross-ade Stadium의 입구로 가는 길에 얼핏 보니 경기장 주변에 아예 큰 텐트를 설치하고서 바비큐와 각종 요리를 준비하며 캠핑의자에 다 같이 앉아 TV를 갖다 놓고 오늘의 경기를 즐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스포츠, 특히 풋볼에 진심이다

입구부터는 정말 사람들이 많아졌고, 줄을 서서 입장하게 되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곳곳에서 Game day food를 파는 곳이었다. 한 번도 이 경기장 안쪽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기에, 나에겐 모든 게 신기했다. 특히 이 경기장 외벽 바로 안쪽에 온통 이런 매점이 자리 잡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해봤던 것이다.

치킨텐더, 감자튀김, 치즈버거 등등의 먹을거리와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가격은 일반적인 레스토랑보다 살짝 비싼 수준
경기장 내부, Marching band가 대열을 갖추어 행진하며 연주하고 있다.
나는 치즈버거에 맥주를 곁들였다. 햄버거는 잘 모르겠고 감자튀김이 맛있었다. 대략 11달러다(맥주제외)


경기장 내부에 들어서니 Student section은 이미 검은색 옷을 입은 이들로 꽉 차 있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다 같이 일어서서 치어리더의 응원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기가 끝날때까지 앉지 않았다). Marching band가 교가를 연주하고, 이어서 미국의 국가인 National Anthem을 연주했다. National Anthem을 연주하는 동안엔 다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린 채 예를 표하고 있었고, 연주가 끝나자 모두들 "USA! USA! USA!"라고 연거푸 외쳐댔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fpYX-Azlg&ab_channel=PurdueAdmissions

Chorus를 따서 Hail purdue라고도 불리는 Purdue University Fight Song이다.


이윽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 공격. 수비 선택 권한이 우리 쪽에 주어졌고, 우리 학교가 선공을 하게 되었다.


킥오프를 기다릴 때는 다 같이 Band가 연주하는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저마다 갖고 있는 열쇠를 들고 머리 위로 흔들어 댔다. 간혹 흔들 거리가 없는 관중들은 신고 있던 신발을 들고 흔들기도 한다. 그리고 킥오프와 함께 공이 허공에 뜨는 순간, 우리 쪽 관중들은 다 같이 "IU Sucks!!!" (여기서 IU는 Indiana University의 줄임말)라고 경기장이 떠나가라 외친다. 아무래도 인디애나 주에서 Purdue와 오랜 라이벌 관계로 남아있는 Indiana University에 대한 감정을 상대편이 누군지를 불문하고 표출하는 고약한 전통인 듯하다.

킥오프를 기다리며 다들 손에 열쇠나 신발을 쥐고 흔들고 있다. 참고로 혼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Penn state 팬이다.


풋볼의 룰은 간단하다. 공을 들고 상대방 진영의 끝까지 가거나, 공을 차서 사각형 틀 너머로 넘기면 점수가 난다. 경기 시간은 총 1시간이며, 1 쿼터에 15분씩 총 4 쿼터로 진행된다. 여기서 자세한 룰까지는 설명하지 않겠지만, 가장 기초가 되며 알아두면 좋을 룰은 바로 Down rule이다.



Down rule과 First down (지루할 수도 있으니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풋볼에서는 공격팀이 공을 방어팀 쪽으로 보내는 게 기본적인 흐름이고, 방어팀은 당연히 공격팀이 공을 들고 진영으로 못 들어오게 저지한다. 이 과정에서 공을 들고 있는 공격팀 선수가 넘어지거나 패스에 실패하여 공을 놓치면 이게 Down 한 번으로 카운트된다. 4번째 Down4th Down까지 10 yard를 전진하지 못하면, 공격과 수비가 전환되고, 공격팀은 공격 기회를 잃게 된다. 반면, 공격팀이 4번 안에 공을 들고 10 yard를 전진하게 되면 그동안 누적된 Down의 횟수가 초기화되면서 새롭게 카운트하게 되며, 다음 다운이 다시 1st down이 된다. 그래서 4번 안에 10 yard를 성공적으로 전진했을 때 이를 1st down이라고 부른다. 1st down이 계속되어야 공격팀이 방어팀의 Touchdown zone에 가까워질 수 있고, 이는 곧 득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무래도 학교 자체가 공대 위주의 남초 집단이다 보니 응원이 여러모로 과격했다. 우리 뒤에 있는 관중들도 경기 시작 전부터 "Fxxk Penn State!!!"라고 온갖 욕설을 허공으로 목이 쉬어라 외쳐댔고, 가장 대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IU sucks!!!"와 First down을 축하하기 위한 First down chant이다. 왜 과격하지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관중들 모두가 거리낌 없이 외쳐대는 걸 보니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전통인 것 같다. 


"One, Two, Three, Four, First down bitch!!!, One, Two, Three, Four, First down dance, First down dance, First down dance, Whoooo"


아래 영상을 참고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STTiZMi1mnw&ab_channel=ummmmm878

First down chant 혹은 First down dance라고도 불리는 응원구호다. 소리 주의.


그나마 Band가 연주하는 박자에 맞춰 팔을 위로 뻗으며 "Boiler up!"이라고 외치는 건전한 구호도 있는가 하면, 심판의 불리한 판정에 "Bull shit!"이라고 다 같이 경기장이 떠나가라 외치기도 한다.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구호를 다 알았겠냐마는, 2 쿼터 정도 되니 원래 알았던 것처럼 관중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외치게 되었다.


Penn state와의 경기는 정말 엎치락 뒤치락의 연속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질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4 쿼터쯤에 집에 가야지 싶다가도, 갑자기 한 번씩 터지는 터치다운과 함께 역전이 일어나면서 다시 관중들의 텐션이 올라가곤 했다. 그 와중에 우리 일행 옆에 앉은 흰옷 입은 Penn state 팬이 적진 한가운데서 Penn state가 선전할 때마다 주변의 검은 옷들에게 비아냥거리면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일행 옆쪽에 혼자서 흰옷을 입은 Penn state 팬이 살짝 맛이 간 Purdue 팬들을 열심히 조롱하고 있다.
한창 열기가 뜨거워진 경기장의 밤, 사람들이 좀처럼 자리에 앉을 생각을 안 한다.
5점을 득점하는 터치다운에 성공했을 때

순수한 경기시간은 딱 60분이 전부인데, Down 한 번당 보통 10초 이상 진행되는 법이 없고, Down이 끝나게 되면 시간이 멈추며 3분남짓 되는 광고가 전광판에 띄워지거나, 팀별로 작전회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쿼터 마다도 쉬는 시간이 있다 보니, 오후 8시에 시작한 경기가 끝났을 때의 시간은 비로소 밤 12시였다. 결국 Penn state와의 경기는 35대 31로 Purdue가 졌다.

경기가 끝나고 돌아가는 관중들의 행렬, 이 거리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건 처음 본다.


경기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정말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람이 빽빽했다. 한밤중에 엄청나게 많은 보행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을 대비하여 캠퍼스 내부의 웬만한 도로들은 전부 차단된다. 평소답지 않은 인파가 급격히 몰리다 보니 사고나 범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블록마다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풋볼 마니아이신 지인분의 가족께서 라이드를 제공해주셔서 아주 편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풋볼 마니아께서는 내가 옆에서 경기 규칙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는 걸 일일이 답해주다 보니 목이 쉬어버렸다. 물론 열심히 응원한 나도 목이 쉬긴 마찬가지.




물론 내가 응원하는 팀이 패배하긴 했지만, 그날의 경험은 정말 "첫술에 배불렀다"라고 할 수 있을만했다. 인파가 이렇게 많이 몰리는 경우도 없고, 다 같이 드레스코드를 맞춰서 오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오늘이 이번 해 시즌 첫 홈경기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술집을 제외하고서 미국인들이 이렇게나 높은 텐션으로 다 같이 미쳐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평소에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캠퍼스나 도시를 배회하던 미국인들이 똘똘 뭉쳐서 '집단 광기'를 보여주는 광경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스포츠 경기를 관람했다기보다는, 평상시에 접하기 힘든 미국의 문화를 또 하나 알아갈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정말로 스포츠에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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