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 포슬포슬한 가을 한 접시
11월은 그리움의 달이다. 따뜻했던 여름이 그립고, 소중했던 옛사랑이 그립고, 미처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가을 제철음식들이 그리워진다.
가을이 제철인 식재료와 음식들은 많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부터 스타벅스의 펌킨 스파이스 라떼(?)까지. 아쉽게도 지금은 11월 중순이고, 대부분의 가을 제철 음식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커튼 뒤로 퇴장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가을 음식이 있다. 비록 가을 제철 음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어떤 가을 음식보다도 더 가을스러운 음식. 가을 하면 떠오르는 낙엽이 상징하는 바로 그 음식.
오늘의 주제는 바로 메이플 시럽과 그의 영원한 단짝 팬케이크다.
팬케이크 (Pancake)는 곡물로 만든 반죽과 물을 섞어서 팬 (pan) 위에 부쳐서 만드는 케이크 (cake)다. 하지만 여기에서 '빈대떡 같은 팬케이크를 왜 케이크라고 부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케이크보다는 오히려 그냥 빵 또는 피자를 만들 때 쓰는 납작한 도우와 더 비슷하게 생긴 팬케이크이기 때문이다.
팬케이크가 팬"케이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전을 찾아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케이크 (cake)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케이크를 뜻하기도 하지만, 둥글 납작하게 만든 빵을 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양에는 포테이토 케이크 (Potato Cake)라는 음식이 있는데, 감자를 잘게 간 반죽을 납작하게 펴서 팬에 부쳐내는 음식이니 케이크의 사전적 의미에는 의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팬케이크는 외국 음식이지만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하고 친근한 음식이다. 감자전이나 호떡과 외관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거부감 없는 무난한 맛 때문에?
사실 팬케이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음식이다.
팬케이크의 시초는 인류가 막 농경사회로 접어들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갓 수확한 곡식을 간 다음 물에 섞어서 불에 구워 먹던 음식이 팬케이크의 조상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요리는 팬케이크와 구운 고기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게 땀 흘려 곡식을 수확한 후에 마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즐기는 따끈한 팬케이크와 육즙이 흐르는 고기...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이제 막 발달하기 시작한 고대의 문명에서도 만들어 먹었을 만큼 팬케이크는 만들기 쉬운 음식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에는 다양한 맛과 모양의 팬케이크들이 존재한다.
미국의 유명한 팬케이크 전문점인 아이홉 (IHOP)에서 판매하는 팬케이크들만 봐도 정말 종류가 다양하다.
팬케이크를 카놀리 (Cannoli) 반죽처럼 말고 그 안을 리코타 치즈와 초콜릿 칩으로 가득 채운 이탈리안 카놀리 팬케이크, 시나몬 가루와 작은 추로스 조각을 크림치즈와 함께 팬케이크 위에 올려내는 멕시칸 추로스 팬케이크, 반죽 사이사이에 치즈케이크 조각을 섞은 팬케이크 위에 생딸기와 딸기 시럽이 올려진 뉴욕 치즈케이크 팬케이크 등 개성 있는 팬케이크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세계의 다른 음식들을 팬케이크와 자연스럽게 융화시킬 수 있다니, 정말 이름값 한번 톡톡히 하는 아이홉이다 (IHOP은 International House of Pancakes의 줄임말이다).
디저트의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에도 다양한 팬케이크들이 있다. 미국의 "정석 팬케이크"와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프랑스의 디저트인 수플레 (Soufflé)식으로 조리한 도톰하고 포슬포슬한 수플레 팬케이크가 유명하다.
두툼한 팬케이크가 정말 부드럽고 푹신푹신해서 나는 일본의 수플레 팬케이크를 마치 "갓난아기 엉덩이 같다"라고 표현하는데, 한 입 먹어보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시럽 같은 경우 일본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메이플 시럽보다 뒷맛이 좀 씁쓸한데, 반죽 자체가 보통의 반죽보다 조금 더 달콤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도라에몽이 좋아해서 죽고 못 사는 "도라야끼"또는 "단팥빵" 역시 일본의 팬케이크 중 하나다. 언뜻 보기엔 과자 같지만 도라야끼는 사실 팬케이크 반죽 사이에 메이플 시럽 대신 일본에서 즐겨먹는 팥 소를 끼워 넣은 음식이다.
일반적인 팬케이크가 질리시는 분들은 도라야끼를 팬에 살짝 데운 다음 메이플 시럽을 살짝 뿌려서 우유나 커피와 함께 드셔 보시라. 도라에몽이 왜 그렇게 도라야끼에 환장(?)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이 먹으면 지나친 혈당 상승으로 졸음이 올 수 있다).
가을은 끝나가고 있다. 하지만 팬케이크는 끝나지 않았다. 메이플 시럽과 버터를 올린 따끈한 팬케이크 한 접시와 모닝커피 한 잔으로 저물어가는 가을의 끝을 잡아보시는 건 어떨까.
P.S. 갓 구운 바삭바삭한 베이컨과 메이플 시럽을 부은 팬케이크는 환상의 짝꿍 중 하나다. 베이컨의 짭조름함과 팬케이크의 달달함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단짠의 마법"을 믿고 한번 도전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