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題와 霧堤
논문을 붙들고 한참 씨름을 하는데 인터넷이 잠시 끊어졌다.
한참을 불타던 불구덩이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거북이처럼 뻗어냈던 몸을 똑바로 세우며 컴퓨터에서 멀어져 손가락으로는 키보드 위 공기를 연주하고 있고 인터넷 창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무제’라는 글씨를 띄웠다.
“무제? 제목을 지을 수 없다는건가.”
컴퓨터도 잠시 끊어져버린 인터넷에 어리둥절했는지 자신의 상태를 ‘무제’라 정의하는걸 보고 한편 신기했다. 곧 하얀 컴퓨터 창엔 눈 여겨 봐야 알아 차리는 정보들이 가득해졌지만 새로운 창을 켜서 국어사전에 ‘무제’를 검색했다.
무제는 무려 6개의 뜻을 가진 단어였다.
몇 개의 ‘인명’을 지나 무제 4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고 있던 뜻이 나왔다.
제목이 없음. 흔히 시나 그림 따위에서 제목을 붙이기 어려운 경우에 제목 대신에 사용한다.
어쩐지 미술관에 그림마다 제목이 없더라. 그 덕분에 단어나 문장에 갇히지 않고 순수하게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좀 난해한 그림은 제목 좀 정해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하게 다시 무제 5,6을 순서대로 클릭했다.
배 위에서 보면 마치 육지처럼 보이는 먼 바다의 안개.
서툴러서 더 바쁜 트랙패드 위 손가락이 잠시 멈춰서 멍하니 뜻을 읊어봤다.
‘안개…’
한 두달을 마음이 내리 무거웠다. 삶이 버겁게 느껴져서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는 기분이라 ‘제발 좀 쉬고싶다’는 생각이 한가득이었다. 매일 머릿 속은 ‘삶은 뭘까’ 같은 답없는 질문만 떠오르고 답은 하나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난 지금의 내 삶이 ‘무제’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지금의 삶의 형태를 내가 정의하지 못해서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안개라니. 지금의 시간이 뜬구름 잡기만 하면 어쩌나 하는 내면의 큰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의 꼬리를 잡고 더듬대고 있는 와중에도 책상 한켠에 밀려난 논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스윽 시선을 주니 말을 걸었다.
‘시간 많나봐? 25장 중에 아직 10장도 못봤는데? 참고문헌이 200개라니까. 언제 다 추려놓게. 정신차려.’
하얀 종이, 까만 글씨 주제에 부담스럽기까지 한 논문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다. 짐짓 덕분이지만 튕기며 말한다.
“참나, 보면 되잖아. 안 그래도 언제 발표할 거냐고 묻는 교수님때문에 해야되거든?”
다시 국어사전의 뜻을 살펴본다.
[배 위에서 보면 마치 육지처럼 보이는 먼바다의 안개.]
그래, 아주 최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걸 수도 있잖아? 내가 걱정하는 최악의 미래가 사실은 뿌연 안개였을수도 있고 걷히고 나면 뭐 파라다이스일수도 있잖아. 미래는 모르겠고 당장 논문이나 읽자.
어른이 되면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면서 걸어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개는 땅바닥, 발 끝에 머문다. 그저 발등에 떨어진 불에 후후 이산화탄소나 불어대며 끄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난 어떤 믿음이 있다. 앞을 보지 못해도 성실하게 가면 낭떨어지는 아닐 거라는 것. 두려움은 조금 내려둬보자. 쉽진 않지만 다짐하는 단단한 마음을 지나가는 커서 뒤에 남겨두며. 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