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부산 범어사를 다녀왔다. 다음 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 데다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소식에 이번에 못 간 여름휴가의 아쉬움을 달래고 내 나름으로 지나가는 여름을 잘 보내고자 세운 계획이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을 하고 막내가 등교를 하자 나는 서둘러 침대를 정리하고 옷바구니에 담긴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에 넣어서 돌리며 설거지를 하였다. 그날, 나는 은은한 바탕에 튤립 같은 잔꽃무늬가 있는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 원피스를 입었는데 오늘 입으면 올해 이 옷을 입을 일은 없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전날 검색한 네이버지도에서 우리 집에서 범어사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김해를 지나 만덕터널을 경유하여 진입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한 가지는 김해와 양산을 거쳐 노포 IC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나는 갈 때는 전자의 방향으로 가고 돌아올 때는 후자로 방향을 정하여 돌아오기로 하였다. 나는 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양산을 준비하였는데 내일 비가 오리라고 예측하지 못할 만큼 날씨가 화창하였다. 집에서 출발하여 터널을 지나 나들목을 지나니 고속도로가 나왔는데 한산한 도로를 벗어나 도심이 가까워질수록 길이 혼잡해졌다. 한 시간을 달려 만덕터널을 지나니 버스전용차로가 있는 도로가 나오고 곳곳에 신호등이 있었는데 이삼십 분쯤 달리니 북쪽 끄트머리에 범어사로 오르는 산길이 나타났다. 오르막길을 대략 4~5킬로미터쯤 달릴즈음 표를 파는 매표소가 나타났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나는 직원에게 근처에 먹을만한 음식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왼쪽으로 돌아 조금만 내려가면 식당이 나온다고 말하였는데 차를 돌려 다시 밑으로 내려가니 카페와 식당들이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나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당 한 곳을 찾아 산나물이 듬뿍 든 비빔밥을 시켜 점심을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나는 왔던 길을 돌아오며 절 입구에서 표를 검표하는 매표원에서 미리 끊은 표를 보여주고 빈자리를 찾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였다.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인 금정산에 범어사가 있었는데 영남의 3대 사찰 중 하나로써 전국 사찰 중 유일하게 삼국유사를 소장하고 있다고 들었다. 주차장에서 대웅전까지 가려면 3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였는데 일주문을 지나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니 천왕문이 나오고 다음에 불이문을 지나니 넓은 대웅전 앞마당이 나타났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웅전 안을 살펴보니 이 사찰의 보물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밖을 향하여 좌정하고 있었는데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삼성각, 왼편에는 팔상 독전 나한전이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며 경내를 살펴보니 마당 한편에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때 건축되었다는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유명한 사찰이라 그런지 드문드문 가족단위의 사람들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위쪽에 있는 금강암으로 향하였다. 이곳을 가려면 계단이 아닌 여러 개의 바위를 지나가야 했는데 여러 날동안 내린 비로 바윗틈에 폭포수 같은 물이 계곡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그늘 속을 천천히 건다 보니 교회와 성당이 지어진 평지와 달리 절이 산속에 있는 것은 계단을 걷고 산을 오르면서 속세의 번뇌와 욕심을 비우라는 의미가 아닌가 잠깐 생각을 해보았는데 땀이 날 정도의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시원한 초록색 잔디가 깔린 금강암이 나타났다. 사찰 마당에는 개 세 마리가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낯선 이를 경계하였는지 으르렁거리며 당장 달려올 듯이 하자 마루에 앉아 계시던 스님 한분이 제지하여 나는 편안하게 경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
금강암은 대웅전이 있는 본 절과 달리 아담하였다. 높은 산 위에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더 가깝고 아래의 풍경 또한 아름다웠는데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산책하듯이 쉬엄쉬엄 걸었다. 걷다 보니 땔감을 모아놓은 아궁이가 나왔는데 장대에 걸린 빨랫줄에 깨끗이 세탁한 옷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금강암을 둘러보고 갈길이 바쁜 사람처럼 다시 계곡을 따라 걸음을 옮겼는데 내려오는 길에 보니 나를 본 다람쥐 한 마리가 도망치 듯 꼬리를 감추었다. 걸어서 밑으로 내려오니 금강암을 가는 사람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과도 마주치고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과도 걸음이 교차하였는데
나는 땀을 식힐 겸 계곡물에 손을 담그며 팔을 적셔보았다. 얼음물같이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더위가 물러나 듯 온몽이 금방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까지 내려오니 점심때 고개를 들어보었던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나무 그늘 밑에 주차한 차문을 여니 안이 후끈하였는데 에어켠을 켜고 창문을 내리며 나는 열기를 식혔다. 많이 걸어 아픈 다리를 쉴 겸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는데 뜨거운 햇살에 잎이 노랗게 물든 나무 한그루가 앞유리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어느 정도 풀리자 내비게이션 화면에 목적지로 집을 설정하며 나는 산길을 내려왔는데 올 때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아 지루하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보니 범어사는 이십 년 전에 와보고 나서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병을 얻고 나서부터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계획 없이 훌쩍 당일 여행을 떠나곤 하였는데 여행지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면 나는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느껴지곤 하였다. 데리고 있던 동생들이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들었지만 제대로 자립이 안되어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전화가 뜸한 요즘 이제야 분가를 시켰다는 생각으로 홀가분함마저 느끼며 키가 자라는 아이들처럼 한 뼘 성숙해지는 여행을 가끔 나는 즐기려고 한다.
이쁜 옷을 입고 소녀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한 그날은 기억은 여름의 순수처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