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

by 박 혜리


어제는 시내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주유하고 같은 건물의 세차장에서 기계세차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삐죽 튀어나온 단발머리를 정리하기 위하여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용실을 찾았는데 따로 조수를 두지 않고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는 원장님은 요즘 흔히 실시하는 예약 없이 순서대로 손님을 받았다. 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전부터 곳에서 오래 미용실을 한 덕분으로 그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앞에 머리를 자르는 손님이 있어 나는 조금 기다리다 자리에 앉았다. 이사를 오고 나서 상가에 있는 여러 군데의 미용실보다 항상 문이 오픈되어 있는 이곳의 미용실을 줄곧 이용했던 터라 그녀는 따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아서 내 머리를 손질하였는데 가위로 뒷 머리를 싹둑 자르던 그녀는 앞에 머리를 자르고 간 손님이 교수 부인이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만원 받던 이발비를 주위 미용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올해부터 만 삼천원으로 올렸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오천원 받는 다른 미용실로 옮겼다며 교수가 그렇게 꼰대인 줄 몰랐다며 우리 아파트에 사는 교수 한 분을 성토를 하였다. 그렇게 혼자 흥분하여 내 머리를 자르던 그녀는 화제를 돌려 요즘 들어 부쩍 사람이 많이 죽는 것 같다고 말하여 아까부터 잠잠히 듣기만 하던 나는 지나가는 말로


"원장님은 죽는 것이 두려우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그녀는


"죽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고 화장을 하게 되면 뜨거울까 봐 그것이 걱정이라네." 하였다.


"매장을 하는 것보다 화장을 하는 게 깔끔하지 않겠어요? 며칠 만에 가족을 떠나 혼자 덩그러니 땅속에 묻히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그렇지만 안 죽어봐서 아직 모르겠네. 뜨거울지 그렇지 않을지는."


죽음이 무섭다기보다 뜨거운 불길 속에 제 몸이 활활 불타는 것이 더 두렵다는 그녀.


나 역시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지난달에는 남편이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의 어머니 장례식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족히 가는 시간만 세 시간은 걸리는 데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에 출발하는 남편이 걱정되어 나는 같이 가는 일행들과 교대로 운전하라며 당부를 하였는데 남편은 한 달 동안 벌써 세 번이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몇 년 전까지 나는 일가친척 외에 한동안 장례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의 모임에서 알게 된 같은 지역에 사는 언니들과 산에도 가고 가끔 만나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하나 둘 그녀들이 내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되면서 그것은 오랫동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죽음을 항상 기억하라는 메멘토모리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와 귀결된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많이 가진 재벌도 학식이 뛰어난 학자도 결국 마지막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이승의 법칙인데 살아생전 불공평함을 겪었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니 죽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는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을 40년 가까이 돌보다 자신의 건강이 나빠짐을 느끼자 '섬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편지 한 장 만을 남기고 조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내다 대퇴골 골절 수술 중 심정지로 선종하신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님의 소식을 전하였다. 앵커는 자신의 시신마저 대학에 기증하였다 말할 때 목이 메었는데 평생을 아픈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다 자신의 몸이 아플 때에는 유머를 잃지 않았고 경증 치매를 앓는 와중에도 소록도에서의 생활을 행복했었다고 기억하는 이분이야말로 진정 성인이구나 싶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한다는 이순의 나이인 미용실 원장님은 운동을 하는 이유가 오래 살기보다 일을 하기 위함이라 하였는데 우리 곁에 맴도는 죽음을 터부시 하기보다 언제라도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게 오늘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오늘 내 폰에는 또다시 부고소식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