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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혜리 Mar 28. 2024

약한 죄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이학년이 되기 전까지 엄마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의 아주머니와 함께 읍내에 있는 새벽시장에 나가  생선이나 어묵등 어물을 받아서 산너머에 있는 마을을 돌며 장사를 하셨다.


그전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고 다니며 팔았고 친구네 포도밭에서 딴 포도를 받아 몇 달간 팔기도 하였다.


엄마가 마지막에 한 장사가 생선을 파는 이었는데 새벽에 시장에 나가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웃의 아주머니와 나누어 대야 같은데 옮겨 담은 뒤에  그것을 머리에 이고 엄마는 마을을 다니시 그것을 파셨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나는 두 동생을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항상 마중을 나갔었는데 겨울해가 짧은 어느 날 밤사이 내린 눈으로  엄마는 아무리 기다려도 고개에 나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 밤, 길이 어두워 건너마을에 사는 친척집에 자고 올 줄 알았던 엄마는 하얗게 내린 눈길을 따라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는 무와 함께  팔다 남은 갈치를  조리셨다.


그날 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의 장작불 앞에 앉은 발갛게 익은 엄마의 얼굴.


그렇게 돌아온 그 고갯길을 방바닥에 모로 누워 보름이고 한 달이고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산고개너머 외갓집에 가기 위하여 엄마는 그 고개를 다시 넘으셨.


그런 날이면 우리는 집 앞에 있는 눈두렁에 옹기종기 앉아 마치 어미가 모이를 물어오기를 기다리는 참새떼처럼 엄마가 고갯길을 넘어오기를 눈알이 벌게지도록 울면서 기다렸다.


그렇게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으면 밭에 가다가도 우시고 술에 취한 아버지와 다투기라도 하면 한 손으로 땅을 치며 남의 집 대문 앞에 앉아 아이고를 연발하며 우시던 엄마.


어릴 적 엄마는 그렇게 눈물이 많은 여자였다.


엄마의 눈물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일까.


크고 작은 일마다 빼놓지 않고 전화하는 남동생은 이번에도 마치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듯이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일의 상황을 물어보고 나서 알겠다고 하자 다음날에는  마치 양치기소년처럼 엄마는 큰 걱정 없을 거라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하다만 숙제라도 남았다는 듯이 막내가 어디 학교를 다니는지 기숙사는 들어갔는지 아니면 자취를 하는지 시시콜물었다.


내가 적당히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아쉬운 소리가 입버릇이 된 동생은 그냥 지나가면 서운하다는 듯이 몇 번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일인 이억을 사기당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알바를 한다며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내게 맛있는 것을 사줄게라며 오래오래 살라는 문자를 보냈다.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말만 하면 하소연부터 하는 얄미운 남동생에게 나는  ㄱ소리하지 마라 너한테 한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이 딴말할 거면 전화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속은 것이 자랑이냐 너는 바보냐라는 말을 속으로 참으며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부자도 제 나름 고민이 있다고 하듯이 사람은 저마다 제각기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하였는데 우리 앞에 눈물을 많이 보인 엄마 때문인지 다른 형제와 달리 유독 마음 여린 남동생에게 하루하루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것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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