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by 박 혜리


봄의 전령인 새싹의 소란스러운 바삭거림으로, 비 온 뒤 풀잎 위를 구르는 빗방울처럼 또는 붉게 타오르는 나뭇잎의 진한 향수처럼, 진눈깨비 내리는 날 스토브를 달구는 장작불의 온기처럼 그녀는 그럽게 내게로 왔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교실에 혼자 남은 나는 고입 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열공 중이었는데 밖으로 나와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올려다본 밤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별이 총총하였다.


우리는 남녀 각 한 반뿐인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키가 비슷하여 앞뒤로 나란히 앉은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반 친구들이 성적에 맞추어 고등학교에 갈 때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친구들과 헤어진 채 따로 생활을 하였는데 옛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는 동시에 세명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명은 내가 사는 동네의 옆집에 사는 친구이고 다른 한 명은 고무장갑도 없이 한겨울 차가운 우물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를 하여 빨개진 손등을 가만히 손으로 감싸준 친구였다. 학교를 다닐 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그녀그때 왜 떠올랐지는 아직도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같은 날에 보낸 세 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나는 비슷한 시기에 받았다. 우리는 각자 다니고 있는 학교 생활을 나누고 종종 안부를 물었는데 두 친구가 편지 대신 전화로 소식을 전할 때에도 S에게서는 계속 편지가 왔다.


학창 시절에 오빠들의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한 그녀는 나뭇잎 코팅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하얀 종이 위에 니체의 글 한 부분을 필사하여 코팅지를 앞뒤로 가지런히 붙여서 내게 보내주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물에 잠긴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쓸 때면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내편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나는 마음이 충만하였는데 삐삐가 등장하고도 한동안 익숙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읽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녀의 넓은 독서에 나는 경외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우리는 편지를 하면서 가끔 통화도 하였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던 그녀의 목소리는 피아노 건반 위를 구르는 손가락의 율동처럼 통통 튀었는데 내가 전화를 하면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만히 들었고 친구가 전화를 하면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조용히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결혼식에 참석한 그녀는 축하를 해 주었는데 늦게 남편이 퇴근을 하는 날에는 아이를 재워놓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이야기꽃을 피웠다.


얼굴이 보고 싶을 때면 운치 있는 고향의 찻집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고 가끔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녀를 보러 가기도 하였는데 위험한 레포츠를 즐기며 높은 산을 오르는 친구의 용기 있는 모습에 나는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내 몸이 아팠을 때는 병문안을 오며 그녀는 위로를 해 주었다. 늦은 밤에 전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던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일에 공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는데 친구 많은 것을 보물을 가진 것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그녀는 관계에 지쳤는지 같은 학교를 다닐 때 만난 친구들과의 모임을 끊을 거라는 말을 남기며 차츰 나에게도 연락이 뜸하였다.


고향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처럼 친구들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 반가워하였다.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나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 할 때에는 짐짓 나는 못 들은 체하였는데 오랜 우정을 생각하여 나는 여느 때처럼 그녀를 대하였다.


한동안 소식이 뜸한 사이에 나는 두 번째 수술을 하였다. 몸을 추스르느라 우리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에 내게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에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났는데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탄 그녀의 어머니가 아는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향해 뭔가를 물으실 때 나눈 몇 마디에서 막내딸을 향한 어머니의 남달랐던 애정이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였다는 말에 단지 나는 말을 아꼈을 뿐이었는데 뒤늦게야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친구에게 나는 짧은 위로의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 할 수 있느냐는 짧은 문자를 보냈는데 그녀는 그때서야 왜 내가 한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는지 깨달았다는 듯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였지만 책을 읽지 않은지 십 년이 지났다는 말만큼이나 나는 그녀가 생경스러웠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라고 노교수님은 말씀하셨는데 만날 사람은 만나고 떠나보내야 하는 인연은 흘러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오랜 세월 함께 나눈 S의 편지는 가끔씩 꺼내보는 사진첩처럼 추억이 되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마치 손이 닿지 않은 별처럼 멀어진 그녀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언제나처럼 손을 흔들어 미소를 지으며 룸메이트였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밤새워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