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자리공, 붉은 줄기가 건넨 말

독을 지닌 채로 익어가는 것에 대하여

by 미소빛나 misobitna

미국자리공. 이름부터 낯설고 입에 잘 붙지 않는 식물을 처음 본 건 며칠 전, 신풍역의 '진을림' 카페 앞에서였다. 거대한 모과나무 옆, 담벼락 아래쪽에 마젠타빛 줄기 하나가 담벼락을 타고 흘러내리듯 뻗어 있었다. 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은 9월, 그 붉음이 유난히 선명했다.



7호선 신풍역 근처 진을림 카페



가까이 다가가니 잎은 두툼했고, 줄기를 따라 종 모양의 작은 꽃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피어 있었다. 햇빛에 비친 꽃잎은 반투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초록빛 열매와 검보랏빛 열매가 시간의 층을 이루며 함께 매달려 있었다. 익어가는 과정이 한눈에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의 혈관처럼 느껴졌다. 삶의 온기와 열기가 그 안에서 고요히 흐르고 있는 듯했다.



미국자리공



그날 오후, 자리공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검게 익은 열매를 쪼아 먹으러 올 직박구리를 상상했다. 저 새는 이 열매에 독이 있다는 걸 알까. 아니, 어쩌면 알고도 먹는 건지 모른다. 적당한 독은 약이 되기도 하니까.


자리공에는 독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독성조차 이 식물의 생존 방식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 식물을 빨래비누로 쓰고, 류머티즘 약으로 쓰고, 어린순을 데쳐 봄나물로 먹었다. 독을 품고도 쓸모 있게 살아가는 법을 아는 식물. 누구에게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독'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은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쉽게 꺾이지 않기 위해.


'미국'자리공이라는 이름처럼, 이 식물은 이방인이다. 언제 어떻게 이 땅에 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 새들이 가장 먼저 찾는 제철 먹잇감이 되었다. 황폐한 숲에서 허기진 생명들을 먹이고, 새들은 그 씨앗을 멀리 퍼뜨린다. 낯선 땅에 뿌리내려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붉은 줄기 위에 달린 열매는 아직 덜 익은 초록빛도 있고, 이미 검붉게 익은 것도 있었다. 하나의 줄기 위에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변화를 기다리며 자리공은 조용히 계절을 통과한다. 무성한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 빛에 조금씩 물드는 열매처럼 나 또한 내 안의 시간을 익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검붉은 열매가 예쁜 미국자리공




나는 그날, 자리공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카페 안의 따스함과 붉은 줄기 하나가 전하는 생명의 온도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삶도, 사람도, 이렇게 서로의 빛과 온기를 닮아가며 자라는 게 아닐까.


자리공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엔 절묘한 균형이 있다. 독과 생명, 붉음과 초록,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 나는 그 경계 위에서, 오늘도 조금은 불안하지만 독을 지닌 채로 단단하게 익어가고 있다.


붉은 줄기가 햇빛을 머금듯, 나의 마음도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자리공이 내게 건넨 말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다.



미소빛나 드로잉 일기, 식물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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