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나
나와 까마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까치나 제비, 참새 어쩌다 논두렁을 우아하게 걷고 있는 하얀 두루미 정도!
비둘기는 모든 국민의 평화의 상징이었고...
80, 90년대는 좀처럼 까마귀가 주변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까마귀를 의식한 건, 98년? 일본 삿포로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교회 근처 전봇대와 전선에 어찌나 많은 까마귀가 앉아 있던지...
'저건 뭔데 저렇게 마을 한가운데 무리 지어서 저렇게 시커멓게 있는 거야!'
'무슨 새가 눈이랑 코랑 입이 구분도 안 돼요. 꼭 저렇게 까매야 해?!'
정도였다
다른 하나는
성경 속에 나온 까마귀,
선지자 엘리야가 500명의 바알 제사장과 대결하고 나서
이세벨 여왕의 보복이 두려워 급하게 몸을 숨겼는데,
그때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서 그에게 마실 것과 열매를 배달시키셨다
사자, 곰, 독수리, 고래가 성경 속 주요 동물인데, 거기에 까마귀도 있다
까마귀는 배달부!
또 하나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눈 세 개 달린 까마귀,
멀쩡한 배우의 눈을 희멀겋게 돌려놓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과거와 미래를 보게 만드는 신비한 동물!
그걸 보면서 '참, 제작자도 기가 막히다. 어떻게 까마귀 눈을 세 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까마귀는 언제나
드라마, 성경, 잠시 들린 교회 근처에만 머물 뿐
나와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는데,
4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4층 높이의 나무가
바람도 안 부는데, 가지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뭔지 모를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야구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는 듯한 소리
멍하게 나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밝은 색의 새 한 마리가 나무에서 치솟아 날아오르고
그 뒤로 까마귀 떼 4,50마리가 일제히 따라 날아올랐다
마치 나뭇가지만 남겨 놓고 나뭇잎이 일제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척 봐도 그 한 마리가 곤경에 처해있는 듯했다
쫓기는 새는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내가 일하는 그곳에 엄청나게 많은 까마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햇살이 눈부신 오후
까마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실리콘 벨리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