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집을 보는 다른 기준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하는 것처럼
집을 잘 사려면, 집을 많이 봐야 한다.
실리콘 벨리의 모든 집을 본 건 아니지만,
요즘은 집 보는 초보의 발걸음을 뗀 기분이다.
마치
20대 초반에 이성을 보는 기준과
30대 초반에 이성을 보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처럼
경험이 쌓이면서
실리콘 벨리에서 집을 살 때
정말 중요한 게 뭔지 감이 잡히는 것 같다.
실리콘 벨리에는 정해진 집 가격이 없다.
사려는 사람이 몰리면
마치 경매처럼 부르는 게 값이 되고
사려는 사람이 없으면,
(어디나 마찬가지 겠지만)
주변 시세가 어떻든 팔리지 않는다.
실리콘 벨리에서 집을 살 때는
가격을 부를 수 있는 가격이 한 번 주어진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집주인이 카운터 오퍼를 주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역시 자본주의는 달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피곤하다.
몇 명이 입찰에 참여했는지,
얼마를 적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기준도 없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눈치와 감에 의지해서
가격을 적어내야 한다.
평균 집 가격이 12억 정도 한다고 했을 때,
눈치껏 적어내는 그 기준이
1억 5천에서 2억 5천까지 그 폭이 어마 무지 한데...
마트에 가서는
500원 더 싼 물건을 사면
뿌듯함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던 내가,
집 가격을 적어 낼 때는
몇 천만 원 정도를 그냥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정보도 없이,
그냥 눈치껏 적어내다니...
이건 도저히
현명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그저 자본주의적이기만 한...
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우롱당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
입찰에 참여했지만,
지금까지 번번이 실패했다.
선심 쓰는 마음으로
1년 치 연봉을 더 얹어서 제시를 했는데도
2년 치 연봉을 더 얹어내는 사람이 있었기에
렌트 기간이 끝나가는 오늘도
갈바를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 스트레스 정도는
프러포즈하고 나서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갖은 구애를 해 보지만,
내 마음을 받아줄지 아닐지 모르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음을 느낄 때
밀려드는 무력감같은...
전에는 대게 잘난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벽에 부딪힌 것 같은
그런 답답하고 감정 소모가 심한 상태.
실리콘 벨리에서 집 사기가
그런 걸 줄은 몰랐다.
모처럼 느끼는
긴장반 설레임반이라서
신선한 느낌이었지만,
정말 피곤함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