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로그에서 연락이 오면 말벌아저씨가 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내 폰 256G 중에 사진이 11G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끌어안고 살 것인가. 이전에 쓰던 아이폰7에서 그대로 넘어온 사진에 지금 폰으로 찍은 사진까지 합쳐서 저만큼이다. 디지털로 쌓인 파일들이 정리되는 날이 오긴 할까? 이제는 클라우드까지 합세해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사진들까지 어딘가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혹시 그때그때 사진을 정리하는 사람이신가요? 존경하고 무섭습니다.
가끔씩 슬라이드박스 같은 앱으로 필요없는 사진들을 좀 지워보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급할 때 사용하는 화면 캡쳐, 트위터에서 보고 저장한 웃긴 짤, 친구가 공유해준 사진이 쌓이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른데. 게다가 이제 조카 사진까지 저장을 해대니 정리라는 것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멋진 사진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뛰지만, 어째 나의 사진첩은 점점 사진 무덤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 한 손에는 사진 납골당(=내 폰)을 들고 다니고, 다른 한 손에는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나도 참 요란이다만, 이게 또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 보는 맛이 있다. 기능이 많아봤자 쓰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이 정도가 딱이다. 노출, 화이트 밸런스 어쩌고…모름…플래시 터뜨려 말어? 이것만 고민하면 된다. 화질이 구리니 사진을 잘 못찍는 티도 안나고 제법 그럴 듯하게 나온다.
놀러도 많이 다니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카메라 하나에 한 계절이 담기고, 정신 없이 바쁠 때는 반년이 담긴다. 필름이 한 칸 한 칸 줄어드는 것이 보이니 스마트폰처럼 마구잡이로 찍을 수도 없다. 구도도 빛도 엉망진창이지만 필름로그에서 업로드가 완료되었다고 연락이 오면 말벌아저씨처럼 달려간다. 좋은 곳에, 좋은 사람들과 갔을 때, 이 순간을 남겨야겠다 하고 꺼내드니까. 궁금하고 좋을 수밖에 없다.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경주에 내려갔을 때, 친구가 쥐어준 코닥 펀세이버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의외의 선물에 큰 감동을 받았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카메라 안에 담겨있는 사진들을 기다리다 열어보면 지우고 싶은 날들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정댓글 해두듯이 좋은 날들은 핀을 꽂아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이 인생의 필름을 쭉 이어 붙여놓았을 때, 한 편의 좋은 영화가 되지 않겠는가.
260324 미솔랭가이드 : [일회용 카메라]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