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영점 맞추기
나에 대한 견적서, 그리고 영점 맞추기
나는 웹툰을 보지 않는 사람인데 이종범 작가의 스토리캠프 유튜브는 종종 본다. 채널의 주력 콘텐츠는 다른 작품에 대한 설명회나 소개 위주인 것 같은데 나는 초대석 콘텐츠를 챙겨 보는 편이다. 스토리에 대한 높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을 데려다 앉혀놓고 하는 이야기들이 좀 소년만화 같다고나 할까? 상대방에 대한 높은 관심과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을 하니까 좋은 대화의 긴장감이 유지된다.
특히 윤태호 작가 인터뷰는 인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엄청 집중해서 봤다.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봤던 부분은 어떤 한 분야의 일을 오래 하다보면 비약적으로 성장할 때가 있고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나에 대한 ‘견적’이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그 패턴을 통해 알게 되는 나에 대한 리포트를 바탕으로 맷집,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조금 다른 부분에 꽂혔다.
나는 여기서 ‘견적’이라는 단어에 꽂혀 한 장면을 캡쳐해두었다. 나도 요즘 나의 ‘견적’이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혼자 일을 하니까 누군가에게 피드백 받을 일이 별로 없다보니 내가 지금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긴가민가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면 대략 가늠이 되겠지만, 사실 지금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과거 회사에서의 나의 직급이나 연봉 같은 것들이 나에 대한 견적서라고 표현하기에는 다소 납작하지 않나 싶다. 그건 그 시스템 안에서는 통용이 되는데, 차포 떼고 바깥으로 나오면 맨몸으로 저울에 다시 올라가야 해서 그것만 믿고 나의 견적을 내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영점 맞추기’가 아닐까. 영점을 정확하게 맞춘 상태에서의 나의 무게, 견적말이다.
사실 회사나 어딘가에 속해 있으면 내가 담겨있는 그릇의 무게를 간과하기가 쉽다. 나도 그랬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 손으로 굳이 놓을 용기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한 번씩 영점을 상상하고 맞춰보는 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을 상상하고 불안에 떨 필요 또한 없지만 인생이 너무 길어져서 나에 대한 견적서를 써야 하는 순간이 한두 번 더 올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견적 이야기 뒤에는 잃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면 오히려 그것이 이유가 없는 낙관성의 근거가 된다는 이종범 작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애초에 인생에 낙관패치 같은 게 장착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느낌을 잘 모르고 살았는데, 요새 조금은 알 것 같다. 영점을 맞춰놓으니 여기서 더 나빠질 걱정에 대한 비중이 엄청 줄어들고, 무엇을 하나씩 더 쥐어볼까 하는 생산적인 시간이 길어진다. 괜찮은 것 같다.
*사진 출처 - 이종범의 스토리캠프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