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X히라노 게이치로 <근접한 세계>
깊생…아니 사유하게 만드는 것
‘사유’라는 단어는 이제 미술관에서만 쓰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국중박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반가’사유’상 정도? 요즘 흔히 쓰는 ‘깊생’이라는 표현이 대체 가능한가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또 다른 맥락 같다. 막상 국어사전에서 사유의 뜻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대단치는 않다. 대상을 두루 생각한다, 라는 두루뭉술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깊생’했다는 표현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사유다.
이 책의 시작은 김연수 작가에 대한 의리이자 충성이자 의무감이자 팬심이자…푹 담글 수 있는 소설을 좀 읽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의 소설은 어렵지만 가끔씩 골이 띵하게 좋을 때도 있어서 신작은 꼭 사서 보려고 하는 편이다. 오히려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를 잘 모르고, 두 소설가의 소설을 함께 싣고 인터뷰까지 싣는 이런 포맷의 책이 생소해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 머리를 울린 건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었다. 한 사진작가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이다보니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나 디테일한 설명 부분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아니, 근데 이게 맞아? 아닌가? 또 저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 있나?’하고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작가가 쳐 놓은 통발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소설을 읽으며 윤리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판단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나도 좀 놀랐다. ‘이 새끼가 개새끼네’하고 넘어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나는 무엇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하고 반추하게 만들다니. 이래서 책 읽기를, 문학을 끊을 수가 없다. 영화는 눈 앞에서 그려주니까 그렇다치자. 문학은 오로지 텍스트로 사람을 다른 세상을 보내버린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허황된 것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 상상력이야 말로 잠깐이나마 다른 삶을 살게 해준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는 경험은 사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불가능하다. 그 어려운 것을 문학은 가능하게 한다. 숏폼에 중독된 자(=나)가 너무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감화를 받은 탓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계속 이렇게 상상력 안에서 사유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나서 책 추천 릴스를 보러 간다…는 인생의 아이러니)
260331 미솔랭가이드 : [근접한 세계] 깊생…아니 사유하게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