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이상형입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 특징

by 새로운






남자친구는 내가 밝고 잘 웃어서 좋다고 했다.


유쾌해서 재미있어서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바보. 그거 다 연기인데. 대학교 때 우연히 읽은 책에서 남자들은 잘 웃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열심히 웃었더니 정말로 남자들이 좋아했다. 그냥 열심히 웃은 것뿐인데 관심 있는 줄 았다며 고백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 이후 나는 웃음을 주 무기로 남자들을 꼬셨다.



남자들의 이상형 리스트는 대체로 1. 예쁜 여자, 2. 지혜로운 여자 3.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여자인 것 같았다. 저런. 그런 건 나에게 없는데. 기억이란 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집에서 부모님이 열정적으로 싸우던 기억밖에 없다. 둘은 각자의 데시벨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가끔씩 물건이 날아다녔다. 소리가 멎고 휴전 상태가 되면 아빠는 문을 쾅 닫고 엄마는 울었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동네를 어슬렁 대거나 친구를 불러내어 노래방에 갔다. 노래 부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가끔 사회에서 밝기만 한 아이들을 만나면 마냥 부러웠다. 그런 친구와 함께 있을 때면 자격지심이 방긋 고개를 들었다. 이 각박하고 희뿌연 세상에서, 그런 맑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 세상에선 그게 상식이었다. 그리고 그 비이성적 밝음에는 언제나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장벽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벽은 마치 거대한 성 같아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은 대체로 슬프다.



물론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금수저에 밝고 인기가 많았다. 대학생이 되니 부모님이 사준 차를 몰고 다녔다. 그 높고 커다란 SUV를 얻어 탈 때면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 가끔 고민상담을 할 때면 이미 해질 대로 해져 다 떨어져 나간 내 자존감을 친절하게 주워서 깨끗하게 털어낸 후 돌려주었다. 고맙고 신기했다.



생각해 보니 연인도 그랬다. 나와 오래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남자친구는 대체로 성격이 좋았다. 긍정적이고 유쾌하고 구김살 없었다. 특유의 위트로 속절없이 웃게 만들고 아무리 짜증을 부려도 푸딩처럼 유들유들하게 흡수했다. 그와 있으면 찌뿌둥했던 기분도 금세 맑아지고 수많았던 고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이래서 사랑받고 자란 사람을 좋아하는 거구나.



드라마 속 부잣집 딸은 꼭 못된 역할로 그려졌다. 늘 주인공 커플을 갈라놓는 데 열을 올렸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 왜 에너지를 저렇게만 쓸까, 그럴 거면 나나 주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삶에도 나름의 균열과 아픔이 있었다. 어느 새부터 인가 드라마 속 악역이 안쓰럽다.



얼마 전 한참 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환했던 얼굴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없단다. 대화는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래도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으니 남편과 양육권을 놓고 소송 중이라고 했다. 그즈음 전 남자 친구의 소식도 들렸다. 하던 사업이 잘 안 돼서 많이 힘들다고, 덕분에 아내와 이혼 이야기가 오간다고. 씁쓸했다. 승리한 듯한 기분이라도 들 줄 알았는데 전혀 유쾌하지 않다.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나 보다.



누구나 딱 1인분의 불행을 안고 산다. 한없이 맑고 밝은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그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 것을. '사랑만 받고 산 사람들'도 그렇다는 사실이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아, 남의 불행으로 행복을 사는 건 안 될 일인데. 하긴 불행도 연대라고 한다면 그냥 뭐 일종의 연대감이라고 치자.


누구나 마음속 곯은 상처가 있다. 그렇게 치면 남자들이 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그 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



배경이미지 Unsplash, Josue Mich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