왐마, 내 나이가 어때서

<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by 새로운





내가 무조건 지고 들어가는 주제가 있다.


나이. 누군가 일부러 우아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해 나를 ‘노처녀’라고 놀릴 때면 이제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매번 정색하고 화를 낸다. 누군가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물어보면 ‘실례니까 실례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다. 게다가 상대가 무반응을 보일 때는 찌그러져 있던 자격지심이 끼어든다. ‘뭐야, 그럴만하다는 거야?’ 아, 꼬였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자꾸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서른을 기점으로, 자존감이 조금 상승한 이후로, 사라진 줄 안 병이 도졌나 했더니 이게 다 나이 때문이다. 나는 요즘 들어 거울을 더 자주 본다. 선크림을 그렇게 열심히 발랐는데도 올라오는 기미가 이렇게 신경 쓰일 줄이야. 화장을 마친 후에는 꼭 팔자주름과 눈가에 팩트가 끼었는지 확인하고 행복하게 웃는 사진 속에서는 눈가 주름을 먼저 발견하는 나 자신에게 놀란다. 아, 지금까지 피부과에 쓴 돈이면 거기에도 내 지분이 꽤 있을 텐데. 가만있자, 리프팅 레이저 맞을 때가 지났다.



나이가 죄다.

남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은 곧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는데,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어느 날은 함께 운동하는 동생이 물었다.



“언니, 언니 애가 셋이라는 게 진짜예요?”

“어... 어? 뭐라고..?”

“누가 그러던데, 아니죠?”



한참이나 곱씹었다. ‘애가 셋’이라는 단어가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후드려 패는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해도 될 일이었을 텐데, 역시 마음에 남는 말은 다 이유가 있다. ‘내 나이면 애가 셋인 게 정상인가? 내가 정말 그렇게 보이나? 나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나?’ 소화되지 못하는 생각은 차라리 퉤! 하고 뱉어내야 하는데 무슨 심보인지 단물 빠진 껌처럼 헛구역질 날 때까지 계속 씹는다. 마치 공포영화를 끝까지 보는 마음처럼.



내 나이는 서른아홉, 뭐 어린진 않지만 아직 아이가 셋은 아니니, 초등학생 때 이루지 못한 꿈을 포기하지 않듯 아직 못다 한 결혼의 꿈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나는 누구와 언제 결혼하게 될까? 결혼 적령기의 훈남은 나를 만나주지 않을 것 같고 주변에 남아있는 동갑이 없다. 능력 있는 연상은... 한참 어린 연하는...?


하아, 역시 희망 고문은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아니 도대체 누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하지?! 과연 마흔 전에 결혼할 수 있을까?! 도대체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건지, 어떻게 하면 나이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괴로움을 줄이는 법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얼마 전 오랜만에 선배를 만났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그녀가 쓴 칼럼을 읽고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 그 길로 '잡지기자가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당시 유명 패션지의 에디터였던 그녀는 그 시절 나에게 롤모델, 아니 우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잡지에 적혀있는 그녀의 이메일 주소로 다짜고짜 메일을 보내 당장 나를 좀 만나달라며 생떼를 부렸고 그 후 우리는 담백한 인생선후배로 사이로 지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만난 그녀의 외모가 변했다. 뭉툭하게 불어난 입술에, 빵빵하게 채워진 볼, 다리미로 쭉쭉 편 듯한 이마가 영 어색했다. 성형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이상하고, 그러니까 그녀답지 않았다. 늘 마구 풀어헤친 헤어스타일에 자유롭다 못해 아방가르드함이 물씬 풍기는, 걸어 다니는 프렌치 시크 '보그 프랑스판'이었던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무례가 될까 물어보진 않았지만, 선배는 아마도 나이 든 모습이 싫었나 보다. 그녀와 자연스럽게 나누는 이야기가 종종 나이 이야기로 쏠리고, 이제는 결혼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다급함, 초조함, 회한 비슷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선배만의 분위기는 정말 독특하고 멋졌는데. 마음속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쓸 수 없는 분야에 대한 괴로움을 줄이는 방법은 그냥 인정해 버리는 거다. 나이가 그런 것을 어쩌겠나.


세 시간 넘게 열심히 글을 썼는데 다 날아간 적이 있다. 어떻게 살릴 수 없나 한참을 씨름했지만 사라진 건 그냥 사라진 거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열심히 썼던 리포트가 날아갔을 때도, 얼마 전 조카와 쌓아 올린 도미노가 발가락 하나에 무너졌을 때도 한참을 울먹대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했다. 근데 이상하게 이전보다 훨씬 더 나았다. 다시금 만지고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문장들, 패턴, 공간들도 생겨났다.


무언가 잘못 정의되었다면 부수고 다시 쌍아 올려야 한다. 인생도, 나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억지로 잡을수록 더 굳건히 불행해지는 것들. 선택할 수 없는 가족, 170cm까지 자라지 않는 키, 어떻게 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되찾을 수 없는 젊음.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침울해지는 것들은 차라리 내 안에서 부수고 새롭게 정의하는 게 낫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자기 합리화’라고 부른다.


내가 나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음이고, 나 역시 좋았던 젊음이 있었다. 그때가 좋았다고 해서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서 나중이 불행하리란 법도 없다. 어차피 젊음은 젊음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 측면에 그늘이 졌을 때는 해를 받는 부분을 보면 된다. 이래서 내 나이가 좋다. 듣기 싫은 것엔 적당히 귀를 닫고 보기 싫은 건 슬쩍 눈 감을 수 있으니까.


자꾸 보이는 팔자주름에는 잠시 눈을 감기로 했다. 때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얄팍하게 합리화하며. 누군가 ‘언니, 팔자주름에 화장품 꼈어요’라고 말하면 ‘연륜이야’하며 웃으며 받아칠 수 있는 여유와 위트가 아직 나에게는 남아 있으니까.


살아보니 인생은 깎이는 모래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한 해 한해 채워가는 것임을. 모든 것을 동시에 소유할 순 없으며 잃는 만큼 늘어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아마도 하얗고 뽀송뽀송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을 지금 나는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 됐다. 아마도 10년 후 오늘의 나는 지금의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와, 저 탱탱한 피부 좀 봐!


아직은 탱탱하다고



배경이미지 Unsplash, Juan Encal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