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마스크 걸>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봤는데, 다 보고 나니 마음이 헛헛하다. 이 험난한 현대 사회에서, 가시밭 길 결혼 시장에서 과연 마스크 없이 살아가는 게 가능한 건지.
고작 사랑이란 게 받고 싶어서 가면을 쓰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어떤 게 가면이고 어떤 게 나인지 잘 모르겠다. 늘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누군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연애도 인생도 남의 기준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게 지겹고 버겁기도 하다.
아아, 연애가 지겹다. 남자고 뭐고 다 피곤하다. 맞추는 것도 싫고 맞춰지는 것도 싫다. 마음씨 좋은 척, 착한 척, 쿨한 척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다들 ‘저러니 아직도 혼자지’라고 생각할까 봐 싱글이 선택 아닌 팔자인 것처럼 비칠까 봐.
그나저나 나도 참 열심히 살았다.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날 때는 음료수 한 병도 제대로 못 따는 여자 행세를 했고 반대로 손 많이 가는 여자를 싫어한다는 남자를 만났을 때는 접촉 사고가 나도 전화 한 통화 안 했다. 공에 잼병이 내가 테니스가 취미인 남자친구를 만날 땐 열심히 테니스를 배웠고 술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날 땐 위장에 빵구가 나도록 소주를 마셔 댔다.
어디 이것뿐일까, 어디선가 남자가 데리러 오는 건 20대나 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늘 먼저 차를 끌고 나가고, 남자가 코스 짜는 건 어린 여자에게 가능하다는 소리에 열등감이 솟구쳐 여행계획부터 세웠다. 30대 여자들의 ‘취집’, ‘상승혼’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돈도 열심히 모으고 계산대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게 자존심 상해서 숟가락을 놓기도 전에 미리 나가서 계산부터 하고 그랬는데, 이게 다 뭘 위한 거였는지. 허망하고 허망하도다.
무언가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내가 그 일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힘든 연애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일까, 그일까? 행복일까, 결혼일까?
한 번은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술이 몇 잔 들어가더니 이상한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남자들은 긴 생머리를 좋아하니 당장 머리부터 기르라나 뭐라나,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딱딱해 보이니 단추를 하나 더 풀어야 한다나 뭐라나. 남자들은 똑똑해 보이는 여자보다 멍청해 보이는 여자를 좋아한다나 뭐라나.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런 소리나 듣자고 남의 눈치 보며 연애했던가. 있는 돈 없는 돈 써가며, 상대의 취향에 맞춰가며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듣는 말이라고는 '그러니까 좀 멍청하지 그랬어'라니.
더 이상 가면 따위는 쓰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는 메이크업도 잘 안 하는 내가, 집에 오면 답답한 속옷은 훌렁훌렁 벗어던지는 내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두꺼운 가면을 쓰고 남에게 맞췄을까. 나는 긴 생머리보다 단발이 더 잘 어울리고, 샤방한 원피스보다는 하이웨이스트 팬츠가 더 잘 어울리는 여자인데. 멍청하기보단 똑똑해 보였으면 좋겠고 야해 보이기보다는 단단해 보였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효리언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우파'의 가비나 '나혼산'의 기안 84를 좋아하는 이유는 ‘보편적임’이라는 가면 뒤에 숨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남들이 대체로 선호하는 타입이 아니라고 쉽게 기죽지 않으며,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더 열광하고 큰 힘을 얻는다. 꼭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남들의 마음에 들 필요는 없다고.
가면을 쓰면 정답이 사라진다.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니까 오히려 도망칠 구석이 생긴다. 그렇게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 한들, 내 모습이 아니니 잘 돼도 문제다. 문득 얼마 전 술 좋아하는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생겼어”
“우와, 잘 됐다! “
“근데 문제가 있어. 그 사람 술 안 좋아한대”
“뭐야, 너 술꾼이잖아”
“안 마시는 척해야지. 나 내년에 시집가야 돼”
친구야, 그거 오래 못 간다(웃음).
*배경 사진 넷플릭스 '마스크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