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쉽게 살이 찐다
나이 드니 왜 이렇게 살이 잘 붙는지, 나잇살에는 장사가 없다. 조금만 먹어도 금세 배가 나오고 전에는 붙지 않던 곳에 쉽게 살이 붙는다. 어제는 ‘뒷구리’에 살이 붙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찌감치 깡마른 몸은 포기하고 마음 편해지는 쪽을 택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다이어트 강박이 심했다.
그날의 기분은 대체로 체중계 숫자에 따라 달라졌다. 살이 빠지면 화창하고 찌면 폭풍우가 몰아친다. 과식을 한 날은 세상 한심한 놈이 되고 소식이라도 하면 사랑이 넘친다. 제일 존경하는 연예인은 코쿤과 산다라 박, 그 재미있는 먹방도 웬만하면 피한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저녁을 거르고 다음날 홀쭉한 배를 봤을 때, 최악일 때는 야식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다.
다이어트 이야기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초등학생 때까지 그저 모든 게 즐거운 아이였다. 친구들과 복도를 신나게 뛰어다니고, 학교가 끝나면 몇 시간이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 공상에 빠지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
모든 것은 중학생 때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키가 크고 살이 빠지면서 갑자기 남자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고백하는 친구들이 많아진 동시에 여자아이들의 질투 섞인 시선도 받았다. 애정이든 질투든 그런 관심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기에 나는 내내 들뜨고 신이 났다.
이게 다 살이 빠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날씬해져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라고.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를 했다. 10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쫄쫄 굶는 게 전부였다. 어린 나는 외로웠고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굶고 있었으니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몸이 힘든 날에는 식욕이 폭발했다. 그런 날은 정말 끝도 없이 먹어댔다. 그렇게 먹고 나면 수치심과 죄책감이 뒤따랐다.
결국 나에게 날씬한 몸이란 곧 타인의 관심이었다. 그것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됐다. 나는 비쩍 마른 몸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연히 연애도 문제였다.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남자친구의 마음을 의심하며 종종 그를 테스트하곤 했다. 습관처럼 ‘나 살쪘어?’라고 묻는다거나 ‘만약에 말이야 내가 살이 찌면-’이라고 떠보며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받으면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속물’이라며 깎아내렸다. 스스로 외모로 대우받기를 바라면서 나의 외모 자체를 폄하하는 뒤틀린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존감이 낮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그러던 어느 해 신년 계획을 세우다 문득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떠올려 봤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다이어 트였다. 나는 이 몹쓸 습관을 바꿔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쭉 지옥 같을 것만 같았다. 책을 찾아보고 블로그를 보며 공부했다. 정보를 모아보니 모든 것은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았다. ‘날씬함이 내 가치를 증명한다’ ‘예뻐야 사랑받을 수 있다’ 비뚤어진 신념 말이다.
잘못된 생각부터 바꿔야 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야’라고 대뇌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지만(사실 지금도 하고 있다) 이상한 만큼 효과가 컸다. 음식에 대한 강박이 생길 때마다 ‘먹고 싶은 걸 먹는다고 다 살이 찌진 않아’라고 설득했다. 맛있는 걸 먹되 양을 줄여 심리적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살이 찐다고 나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이해시키고 내 인생이 이 모양인 건 살 때문이 아니라 태도 때문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말이다. 나를 정신적으로 후두려 패거나(?) 거칠게 비난하는 대신 부족함을 인정하고 보듬는 쪽을 택했다. 하루 정도 야식을 먹어도 귀엽게 봐주고 몸무게가 늘어도 천천히 빼자고 다짐했다. 옷이 맞지 않으면 헐렁한 옷을 골라 입고 살이 빠지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었다. 나는 여리고 멍청하며 나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마흔이 다 돼서도 나는 아직도 몸무게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살이 쉽게 찌는 체질로 바뀌었고 식욕도 전보다 늘었다. 하지만 예전 같지만은 않다.
나에게 강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남들처럼 그리 예민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다면 아마 온 세상이 아름다웠겠지. 매 끼니마다 다짐하고 음식과 그걸 마구 먹어대는 내가 두렵진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언을 남긴 철학자 칸트는 당대에도 알아주는 강박증 환자였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정확히 7시에는 강의를, 9시에는 글을 썼다. 오후 1시가 되면 점심을 먹고 3시 정각에 같은 장소를 산책했다. 결국 그는 철저한 루틴과 사유로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도 비슷하다. 그는 언제든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죽음에 대한 강박은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일생을 쏟게 도와주었다.
나는 고통이 인간을 만든다고 믿는다. 고통이 없으면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으면 변화가 없다. 내 삶의 목표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모든 고통으로부터 유연해지는 것이다. 강박과 고통을 넘어서서 더 유연한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다. 48kg라는 비정상적인 숫자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은 나이 때문에 쪄버린 살과 연대하며 사이좋게 사는 게 나의 목표다.
누구나 크고 작은 자기만의 강박이 있을 것이다. 이 녀석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녀석을 잘만 이용하면 분명 당신의 강점이 된다. 평생을 크고 작은 강박에 시달린 내가 다이어트하듯 깨달은 교훈이니 믿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