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운전만 하다가
지하철을 타면
좋은 것이 하나 있다.
이동 시간 중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니
자리가 없길래
노약자석 반대 방향에
의자가 없는 구석으로 갔다.
오늘 내가 출근해서
수업해야 하는 내용을
벽에 기대서 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 젊은 남자가
내 옆을 비집고
들어와 선다.
그러면서
"영어가 문제가 아니야."
"외국인이 문제가 아니야."
"미국이 문제가 아니야."
라고
계속 떠들어 댄다.
영어 지문을 읽고 있는
나를 향해하는 말이었다.
공간이 좁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굳이
이쪽으로 올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살짝 장애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고
단정 짓기가 또 미안한 것이
유모차를 끌고 온 여성분에게
공간을 양보하는 그런
예의 바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을 내어주고 그 청년은
노약자석 앞으로 가더니
온갖 참견을 다 한다.
"고지혈증이 문제가 아니에요."
"아줌마! 냉면이 문제가 아니에요."
"시끄럽게 통화하시고 예의가 없으시네요. 전화 통화가 문제가 아니에요."
앞에 있는 어르신들 말에
일일이 다 참견한다.
참견을 당한
한 아주머니께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사탕을 건네주셨다.
그러더니
"사탕이에요? 왜 주시는 거예요?
엿 먹으라고요?"
이러는데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청년은
엿 이야기를 날리고 난 후,
참견의 대상을
열차 전체로 바꾼다.
눈에 보이는 건
다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것도 문제가 아니고
저것도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 청년이 생각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원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인지라
직접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순간
지하철 안에 있는 시선들이
모두 다 우리 쪽을
향할 것 만 같아서
고민 고민하다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열차 밖에선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으니
출근길만 아니면
따라 내려서 물어볼 텐데
그럴 시간도 없었다.
물어보지 못하니
혼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청년이 말하는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잠깐이나마 본
그 청년은 예의가 바르기도 했고,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면
지적 수준이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지체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남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적 질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던가 말던가
개의치 않고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사실 그 부분이
그 청년과 지하철 안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 청년 눈에는
보였던 것이 아닐까?
본인과 타인들과의 다른 점이
본인 기준에선 문제 있게
비쳤을 것 같기도 했다.
지하철 안에서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예의라는 가면을 쓰고
'남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주관보다
남의 의견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비칠까
극도로 신경을 쓴다.
지금 나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그 청년에게 궁금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문제였다.
출근 후,
대학을 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지하철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과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라는
화두를 던지며 말이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하는 친구들에게
좋은 대학을 가려는 목적을
'타인'이 아닌 '본인'에게
두길 바란다는 말을 곁들였다.
나는 내 제자들이 도전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한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사회인이 되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얻은
학벌이란 결과가
타인에게 평가받는 잣대가 아닌
본인 성장의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지금은
좋은 학벌을 갈구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 학벌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지하철 청년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학벌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