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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승무원

엄마는 슈퍼우먼이 아니야

by 미쌍이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하던 날들(긴 설연휴)을 지나 이틀 전부터 아이들 봄 방학이 시작됐습니다. 한창 성장 중인 첫째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배고프다고 성화네요. 얼른 이것저것 때려 넣고 후루훅 볶음밥을 해 먹이고는 청소를 시작합니다. 윙윙대는 청소기를 밀며 거실을 지나는데, 세탁 바구니에 한 번 입고 찌끄려 넣은 빨랫감이 한가득입니다. 어제 해 널은 빨래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이래서 건조기를 들여놔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엄마가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걸레질을 하든 말든 소파에 널브러져 티브이 시청 중인 녀석들.

"엄마는 할 일이 산더미인데, 도와줄 사람 없어?"

"아아, 귀찮아. 그냥 엄마가 해. 엄마 일이잖아!"

세상에, 엄마의 일이라는 게 집안일이었던가요? 한 집안을 꾸려가는데 해야 하는 살림은 엄마 혼자 만의 몫은 아닐 겁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고요. 그런데도 아이의 저런 반응을 듣고 있자니 자격지심이라는 게 불쑥 고개를 쳐듭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엄마 일'이라 하면 비행기 타러 가는 거였는데, 내가 이런 대접이나 받자고 퇴사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새삼스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뭐긴 뭐야! 네가 선택한 일이지'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밀려옵니다.

그때는 일 하러 다니면서
이걸 다 어떻게 했지?

워킹맘으로 일했던 그때는 회사일과 집안일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더 아등바등했던 것 같습니다.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고, 밤 샘 비행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유니폼을 벗어던지면 제일 먼저 청소부터 하던 미쌍이 승무원이었습니다. 며칠 집을 비울 때는 혹여 아이들 배곯을까 싶어 바지런히 장을 봐다가 냉장고를 채웠고, 일하고 돌아온 뒤에는 아이들의 빈 마음을 채우려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엄마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그늘이 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더 악착같이 움직여 여행도 가고, 체험도 가고, 놀이터를 지키며 동네 엄마들과 소통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삼일 쉬는 날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습니다.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상태로 집안일을 하고, 커피 한잔 입에 털어 넣고는 아이들 스케줄을 따라 움직였던 시간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검은 캐리어에 짐을 바리바리 채워 넣고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언니, 그래도 좋겠다. 일 나가면 호텔에서 혼자 쉴 수 있잖아. 부럽다!"

"미쌍아, 애들 키우면서 커리어도 쌓고 진짜 대단하다."


부러움 섞인 말도, 격려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내 처지에 빗대어진 비아냥처럼 들렸습니다. 육아도, 살림도 심지어 회사일도 잘 해내지도 못하면서, 어느 것 하나 놓지도 못해 손에 꽉 쥐고만 있는 모양이라니. 속 빈 강정이 따로 없었습니다.

게다가 코시국에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이들 교육까지 신경 쓸 것은 더 늘어났습니다. 방과 후 수업에 학원까지 요일마다 다른 스케줄을 아이들 스스로 소화기란 아직 어려워 보였습니다. 결국 엄마의 부재는 구멍으로 드러나 타지에 있는 미쌍이에게 다급한 전화가 몇 번이나 울렸습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기에 남편과 아이들의 두 할머니에게 SOS를 쳤지만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졌습니다. 점점 쌓인 스트레스는 검은 감정으로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뾰족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회사를 그만두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만 나날이 또렷해졌습니다. 그런 생각과 감정이 점점 미쌍이를 억눌렀을까요?

12월의 마지막 스케줄이 장거리 비행으로 1월 초까지 걸쳐져 있었습니다. 친한 동기와 함께 가는 비행이 연말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거닐고 맛있는 햄버거에 맥주도 한 잔 걸치며 스테이를 잘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비행기에 올라 서비스 준비를 하고 승객들을 맞았습니다. 평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이륙 준비를 위해 safety Check를 마친 미쌍이 승무원. 사무장에게 이상 없음을 보고 하고 점프싯(Jump seat)에 앉았습니다.

'띵, 띵!'

이륙 사인이 나고 덜덜덜 바퀴를 굴리며 비행기가 속력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왼쪽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 오고 갤리 공간이 이상하게 뒤틀리는 느낌입니다. 숨이 턱 막히면서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시공간이 멈춘 듯 꿈꾸는 듯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이대로 정신을 놓는다면 제가 미쳐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이대로 더 있다가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순간,

'띵!'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지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증상이 싸악 사라집니다. 이런 증상을 호소했던 승무원을 이전에 들어봤습니다. 지인 중에도 몇 있었고요. 비행을 마치고 미쌍이 승무원은 지인과 전화 통화 후 신경정신과 상담을 잡았습니다. 공황 발작, 우울증을 동반한 공황 장애. 더 이상 워킹맘으로 살기엔 그 무게가 버거웠나 봅니다. 약을 먹으며 몇 번의 비행을 더 오가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그만하자!

그렇게 미쌍이는 아이들이 놀리듯 말하는 '백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공황 장애는 초기에 상당과 약물 치료를 병행했던 터라 6개월이라는 기간에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 병의 근원을 퇴사라는 칼로 도려냄으로써 빠르게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퇴사 후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그 해를 병원과 함께 하는 해로 보내긴 했었지만 말입니다. (이 뒷이야기가 <슬기로운 입원생활>에 나오는 것입니다.)


가끔은 불안이 올 때가 있지만 그때의 강도만큼은 아니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도로 정상적입니다. 마음의 병이 더 깊어지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오랜 기간 다닌 회사가 그만두기 아깝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 거의 다 키워놓고 왜 그만뒀느냐고도 묻습니다. 몇 년만 더 버티면 아이들도 클 테고 엄마를 찾지도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한갓 '백수'로 치부한다 해도, '엄마의 일'이 버겁게 나를 짓눌러도 그때로 되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억눌린 감정을 눌러가며 꾸역꾸역 버텨냈던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물론 저에게도 힘든 시간이었기에 현재의 안정된 생활과 매일을 함께 하는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렇게 과거를 끄적이며 새로운 미래를 적어나가는 오늘을 살렵니다. 오늘 꿈꾸고 소망하는 바가 내일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아이들과 아웅다웅 커 나가렵니다.

"얘들아, 엄마는 슈퍼 우먼이 아니란다. 우리 같이 잘 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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