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는 승무원 혹은 퇴사자
일주일간 멀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핑계 삼아 글쓰기도 한 주 쉬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이제 이틀째인데 마음이 영 잡히질 않네요. 아주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습니다. 14시간 그곳에 실었던 몸은 내렸으나 마음은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윙윙 거리는 엔진 소리가 가슴을 누르고, 저를 비행기의 좁은 복도 끝으로 자꾸만 밀어 넣습니다. 그간 잊고 지냈던 답답함이 슬쩍 치고 올라옵니다. 잊은 것이 아니라 그저 억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그 시간들처럼.
승무원이 아닌 승객으로 비행기에 오른 미쌍이. 연차휴가를 야무지게 써서 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길입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티켓을 사용했으니 반만 승객이라 하겠습니다. '반인반수'도 아니고 '반만 승객'이라면 나머지 반은 무엇일까요?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실는지요. 그 나머지 반은 회사에 소속된 승무원으로 채우게 됩니다. 반승객 반승무원인 셈이지요.
항공사를 다니면서 가장 크게 누릴 수 있는 복지 혜택이 있다면 저렴한 티켓을 들 수 있습니다. 취항하는 노선은 물론이고 제휴된 항공사들이 운항하는 노선들까지, 크게는 정상운임의 10분의 1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상운임을 낸 보통의 승객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빈자리 상황에 따라 여행을 갈 수도 있고, 무한 대기 후에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다가 직원 티켓은 이름 옆에 표시가 뜨니 여행길이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승객들의 운임도 코드로 모두 구분됩니다)
식사를 주문할 때는 아무거나 혹은 여유 있는 걸로. 시원한 맥주나 와인이 당겨도 그저 물 한잔으로 달랩니다. 티켓값을 100프로 다 냈건 안 냈건 그걸 떠나, 일하고 있는 승무원의 업무 강도를 생각해 최대한 쥐 죽은 듯 자리만 차지하고 갑니다. 누가 그러라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승무원들 사이에는 그런 풍토가 자리 잡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서도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라면 혹여 PAX Call(승무원 호출 버튼)을 누를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승객으로 탔으면 당당히 요구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려라'
남편이 이해 안 간다는 듯 미쌍이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내 같이 여행 가는 가족들마저 덩달아 눈치 보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업무 중인 승무원이 제 자리를 스쳐 지나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는 미쌍이. 그걸 보고 있자니 답답할 노릇이지요. 미쌍이의 남편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립니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만들어낸 '반만 승객'인 승무원은 보통 여행 갈 때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이번 여행은 다르다!?
퇴사한 지 어언 2년 차.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신이 납니다. 이제 소속감 따위는 벗어던진 지 오래(?)라 승무원들 눈치 따위 보지 않겠노라 다짐해 봅니다. 탑승구에 들어서며 티켓을 공손히 보여드리고는 꾸뻑 인사를 합니다. 자연스레 기수, 이름까지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며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복도에 서서 인사를 건네는 승무원들 중에 아는 얼굴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일반 직원인척 슬쩍 묻어가도 괜찮겠습니다. 긴장감이 조금 풀어지는 듯합니다.
눈치 볼 것 없다고 큰소리친 게 언제인지 자리에 앉아서도 눈동자가 바삐 돌아갑니다. 프로시저에 따라 움직이는 승무원들을 눈으로 좇으며 저도 모르게 계속 의식합니다. 모니터에 예능프로그램을 틀고 귀를 틀어막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의연해지겠지요.
피식거리며 화면을 보는데 둘째가 멀미약을 찾습니다. 분명히 가방에 챙긴 것 같은데 화물로 붙이는 짐에 넣었나 봅니다. 막 좌석 벨트 사인이 꺼졌고 식사 서비스 준비로 바쁠 타이밍입니다. 미쌍이가 쭈뼛거리며 갤리로 향합니다. 멀미약을 가지러 가는 발걸음이 사뿐사뿐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저 승무원님, 멀미약 한 개만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좌석 번호 알려주시겠어요?"
"아, 30 Golf, 아.... 30G입니다..."
아뿔싸, 십수 년간 쌓아 올린 습관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알파벳을 특정 단어로 말하는 항공 용어가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 황급히 자리를 뜨지만 뒤통수가 따갑습니다.
'반만 승객'인 퇴사자의 여행은 이대로 괜찮았을까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아는 얼굴이 여럿입니다. 미쌍이는 자꾸만 주니어시절 '반만 승객'인 승무원으로 돌아갑니다. 안 그래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비행기라는 그 공간은 미쌍이를 퇴사자가 아닌 승무원으로 끌어다 놓습니다.
언제쯤이면 편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요? 10분의 1의 티켓이 아닌 Full Pay 승객이 되는 날, 그날이 되면 진정한 승객으로 비행기와 승무원을 마주할 수 있을까요? 미쌍이도 미래의 그날이 궁금해지는 기나긴 여행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