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에 갈 순 없지만, 세비체

Ceviche | Viva Mexico

by 제이조이



흐리거나 쌀쌀한 날이면 알피는 "수프를 만들기 딱 좋은 날이네"라고 해요. 그래서 그날도 알피는 세비체 대신 수프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세비체(ceviche)는 생선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라임즙에 저며서 토마토, 양파, 고수 등의 재료들과 함께 먹는 멕시코뿐만이 아닌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음식이에요. 칸쿤 여행을 할 때 하루에 한 번 꼴로 세비체를 먹었던 기억이 나요. 물론 알록달록 새콤한 세비체는 아주 쨍한 날 바닷가에 앉아서 먹어야 제맛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날은 세비체여야만 했어요. 친구 Y가 놀러 오기로 했거든요. Y는 해산물을 좋아하는데 특히 주꾸미와 낙지류를 좋아해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주꾸미와 낙지 사이에서 고민하곤 해요. 그러니 분명 세비체도 좋아할 거예요. 더 추워지기 전에 세비체를 먹으면서 칸쿤의 햇살도 떠올려보고 싶었고요.




IMG_7662.JPG 툴룸의 바다




Y가 한 시쯤 도착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전에 세비체의 준비단계를 끝내는 건 제가 맡았어요. 알피가 써준 리스트를 가지고 장을 본 다음에 생선을 라임즙에 재워놓는 거예요.


우선 마트에 가서 작지만 튼실한 라임 대여섯 개와 망고 하나를 샀어요. 세상에 라임이 한 알에 천삼백 원이고, 망고가 한 알에 오천 원이 넘었어요. 이럴 땐 멕시코가 그리워요. 만원이면 일주일 동안 먹을 과일을 양손 가득 들고 올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음으로는 흰살생선이에요. 구워서 완전히 익혀먹을 용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선한 회를 사야 할 것 같아서 수산시장에 갔지요. 초밥은 자주 먹어도 회만 따로 사본 적은 없어서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할지도 감이 안 왔어요.


"어.. 광어 400그램 정도가 필요한데..."

"그렇게는 안 팔아요. 이렇게 마리당 키로로 팔지"

"저 광어 한 마리에 얼마예요?"


주인은 순식간에 수조에서 납작한 광어 한 마리를 건져서 저울에 올렸어요. 광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별 미동이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어요. 이왕이면 좀 팔딱팔딱 뛰는 신선한 걸로 잡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왠지 이미 물 밖으로 나와버린 광어가 민망해할 것 같아서 말았어요.


"이게 한 960그램 정도니까 이만 삼천 원 정도예요. 괜찮죠?"


무게 개념도 없고 얼마가 적정가인지도 잘 모르니 그냥 회를 떠달라고 했어요. 말간 속살을 드러낸 광어회가 포장되어 나왔어요. 가만. 아무리 봐도 900그램이 넘어 보이진 않는데... 아.. 껍질이랑 뼈랑.. 내장이랑.. 다 제거했으니까.. 하.. 400그램도 안되면 어쩌지? 혼자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얼른 저울을 꺼내 무게를 달아봤어요. 배가 고파서 포장을 뜯자마자 하나 집어먹은 살점까지 합하면 딱 400그램이네요. 피식 웃음이 나왔어요.






이제 이 생선살을 라임즙에 저밀 차례예요. 라임을 세 등분 한 뒤 손으로 꽉 짜니 상큼한 즙이 흘러나와요. 냄새 때문에 침이 고이네요. 문제는 이렇게 몇 개쯤 짜다보면 힘이 든다는 거예요. 라임 크기가 손에 딱 들어올 정도로 작은 데다가 껍질이 생각보다 튼실하기 때문에 손아귀 힘으로만 즙을 완전히 짜내는 건 좀 어렵고, 그렇다고 손가락 힘으로 하기엔 역부족이었어요. 아직 세 개가 더 남았는데 손은 벌써 너덜너덜해졌어요. 게다가 Y가 도착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라임 조각을 꾹꾹 눌러 즙을 짜냈어요. 비싼 라임을 대충 짜서 낭비할 수는 없다는 오기로 마지막 조각까지 다 짜내고 나니 한 컵이 넘는 즙이 나왔어요. 여기에 찬 물 100ml를 추가한 뒤 둥근 볼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생선살 위에 골고루 붓는 거예요. 곧 하얗고 말간 광어회 위로 라임즙이 자작하게 채워져요. 이제 그릇 위에 랩을 씌워서 냉장고에 집어넣으면 준비는 끝이에요. 그나저나 생선살이 저며지기 전에 제 손가락이 먼저 부식될 것만 같아요. 손톱 사이가 따끔따끔하고 쓰려서 손을 헹구고 Y를 만나러 서둘러 나갔어요.



IMG_1899.JPG 멕시코에서는 쟁여두고 먹던 라임




라임즙과 광어회가 만나 천천히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동안 우린 공원에서 커다란 돗자리를 깔고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모처럼의 여유를 부렸어요. 조금 흐리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피크닉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더 컸던 터라 그다지 문제가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인지 공원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 밖에 없었고요. 잔디 위 푹신한 돗자리에서 뒹굴거리며 하늘을 보며 오랜만에 수다 삼매경에 빠졌어요.


"야 우리는 17살 때나 지금이나 하고 있는 대화의 수준이 똑같아."

"오십 넘어서도 그럴 거야 아마."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지금 우리보다도 어렸어"

"말해 뭐하냐"


드디어 요리사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길래 우린 자리를 정리해서 집으로 갈 채비를 했어요. 생선으로만은 살짝 부족할 것 같다고 생각되었는지 알피는 오는 길에 새우를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새우를 사들고 집으로 가니 알피는 재료들을 가지런히 다듬어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물론 손님을 맞이하는 경쾌한 음악과 따뜻한 조명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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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다른 종류의 세비체를 만들 거라서 재료를 따로따로 준비해두었어요. 첫 번째는 당연히 양파, 토마토, 고수에 생선을 버무린 가장 기본적인 버전, 망고와 적양파가 들어간 달콤 상큼한 망고 세비체, 마지막으로 오이와 적양파와 살짝 데친 새우를 넣은 쉬림프 세비체(Agua Chil)가 오늘의 만찬이 될 거예요. 라임즙에 절여져서 뽀얗게 된 생선살을 잘게 찢어 재료들과 섞으면 끝이니 간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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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 담긴 각각의 세비체의 색깔이 너무 예뻐서 선뜻 먹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봤어요. 그러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새콤한 냄새에 금방 침이 돌았거든요. 마음에 드는 세비체를 얼른 한 스푼 떠서 따뜻하게 구워진 바삭한 또띠야에 올린 다음 크게 한 입 베어 물어요. 그리고 세비체의 청량하고 새콤한 맛과 바삭거리며 씹히는 고소한 또스따다의 조합을 열심히 음미해요. 토스타다는 또띠아를 튀긴 건데 알피는 튀기는 대신 오븐에 구웠어요. 다 베어 물고 조금밖에 남은 토스타다 조각에도 최대한의 세비체를 얹어서 먹게 돼요. 세 가지 세비체가 맛이 각각 달라서 번갈아먹는 재미도 있었어요. 특히 새우가 들어간 아구아칠(Agua chil)은 살짝 매웠기 때문에 그걸 먹고 난 다음엔 바로 달콤한 망고 세비체에 손이 갔지요. 모두가 가장 좋아했던 건 단연 토마토와 양파가 들어간 클래식한 세비체였어요. 빨간 토마토와 하얀 양파, 초록색 고수가 멕시코의 국기를 연상시켜서 멕시코의 독립기념일인 9월 16일을 기념하기에 딱이기도 했고요. 지금까지 멕시코에 세 번 갔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중 두 번은 독립기념일을 함께 기념하며 Viva Mexico를 외칠 수 있었어요. 화려한 불꽃축제로 온 다운타운이 인파로 마비가 되어서 괜히 차를 가져갔다가 옴쭉달싹도 못했던 게 기억나요. 올해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멕시코 음식을 만들어 모히또 잔을 부딪히며 축하했어요.


곧 다가오는 죽은 자 들의 날(Día de muertos)에는 어떤 음식을 만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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