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Mole 먹고 싶은 멕시코 음식

Mole | 투박하고 진하고 정다운

by 제이조이



이 날도 집 앞 공원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다가 들어왔어요. 물론 마스크로 코까지 바짝 가려야만 했지만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누워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나른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는데 배가 슬슬 고프기 시작하잖아요. 아무거나 대충 데워먹고 누워버리고 싶은데 집에 오자마자 알피는 또 분주해요.


"알피야. 왜 그렇게 혼자 바빠요?"

"오늘 몰레 만들 거예요"

"몰레를 만든다고? 진짜?"



Mole poblano @사진 출처 https://www.ritualchocolate.com/



몰레(Mole)를 처음 먹어본 건 멕시코의 한 식당에서였어요. 흡사 짜장 소스같이 생긴 시커멓고 묵직한 소스를 닭요리 위에 듬뿍 얹어서 먹더라고요. 한 입 먹어봤는데 매콤하면서 깊은 맛이 인상적이었지만 조금 부담스러워서 한 그릇을 다 먹고 싶진 않았어요. 원래 양념 범벅 같은 건 잘 먹지 않거든요. 그런데 작년 겨울 저희 결혼식 때 알피의 누나가 한국에 오면서 이 몰레 양념을 가져온 거예요. 그 날 함께 요리한 몰레를 싹싹 긁어먹은 뒤로는 좋아하게 됐어요. 게다가 엄마가 만들어주신 잡채에 이 까만 몰레를 듬뿍 넣어서 같이 볶아먹으니 이 맛이야말로 신세계더라고요. 아쉽게도 다 떨어져서 그 이후로는 못 먹었는데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에 몰레가 있었어요.


"몰레를 집에서 만들어먹는 건 처음이야"


빨간 건고추의 배를 길게 가른 뒤 씨를 빼내면서 알피가 말했어요. 멕시코에서도 보통은 사 먹거나 되어있는 양념으로 먹는대요. 하긴 한국 사람들이 고추장이나 된장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죠. 몰레는 지역에 따라, 만드는 사람에 따라, 집마다 전해져 오는 레시피에 따라 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가 천차만별이에요. 그래서 색깔도 다르고 맛도 달라요. 색깔이 연할 수도 진할 수도 있고, 달콤하거나 매콤하거나 훈제향이 강할 수도 있어요. 꼭 우리나라 김치와 비슷하죠. 보통은 여러 가지 말린 고추, 각종 씨앗, 초콜릿 약간, 또띠야, 토마토, 양파, 마늘 등을 갈아서 칠면조나 닭 국물을 넣고 걸쭉한 소스를 만드는 식이예요.




몰레에 들어가는 재료들 @사진 출처 http://www.thecandokitchen.com/




알피는 칸쿤에서 일할 때 몰레를 처음 만들어봤대요. 몰레는 축제음식이라 결혼식에 빠지지 않는 메뉴인데 그 당시에 굉장히 호화로운 결혼식 연회에 쓰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갔다고 해요. 300인분을 만들려다 보니 말린 고추 안에 씨 빼는 작업부터가 오래 걸렸는데, 그때 모르고 장갑을 안 끼고 했다가 그날 밤 손가락이 타는 듯이 아파서 혼이 났대요. 치칠로(Chicilo)라고 불리는 이 블랙 몰레는 보통 준비하는데 7일이 걸린다고 해서 "7 days Mole"라고 불린대요. 실제로 일주일이나 걸리진 않았고 사흘 정도 걸렸다는데 우리는 저녁으로 먹기 위해 후딱 만들었으니 아주 간단한 버전의 홈메이드 몰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참, 몰레는 Cocina prehispánica야”

"그게 뭔데?"

"스페인 침략 전의 음식이란 뜻이야. 그러니 역사가 오래된 전통적인 음식이지"

"아.. 음식도 스페인 침략 전과 후로 나뉘는구나"

"당연하지. 고추, 토마토, 옥수수 또띠야, 카카오, 살사, 아보카도, 콩 같은 건 토착 원주민들이 원래 먹어왔던 음식이야. 그 이후에 유럽에서 식재료들이 많이 들어왔지."

"양파도 멕시코 꺼야?"

"아니, 유럽."

"그럼 고수는?"

"그건 아시아. 스페인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멕시코에서 가장 큰 가축이 뭐였는지 알아?"

"글쎄.. 돼지?"

"칠면조야. 웃기지? 멕시코에 소, 돼지 이런 건 원래 없었어."

"그러면 Prehispánico 음식을 멕시코 사람들은 보존하려고 하나?"

"그렇지.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고."


몰레를 만들면서 온갖 역사이야기가 이어졌어요. 알피가 한국어를 조금만 더 잘할 수 있게 되면 아메리카 역사 이야기 수업을 열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음식 하나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 재료를 한데 모았어요. 산책하고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재료로만 만들기로 했는데 그래도 필요한 건 거진 다 있었어요. 우리의 첫 몰레에 들어간 재료는 땅콩, 아몬드, 호박씨, 해바라기씨, 볶은 깨, 말린 빨간 고추, 양파, 마늘, 토마토, 또띠야, 그리고 각종 향신료예요. 양파, 마늘, 토마토는 구워서 익혔고 또띠야는 사분의 일로 잘라서 바짝 구워서 나쵸칩처럼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이 재료를 밀러에 넣고 갈아요. 옥수수를 갈기 위해 사둔 밀러에 몰레 재료를 넣고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어요. 고추 껍질 때문에 완전히 곱게 갈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썩 괜찮아요. 그러고 나면 미리 준비해둔 닭국물을 함께 넣고 약불에 저어가면서 익히다 보면 어느덧 소스라고 하기엔 묵직하고, 페이스트라고 하기엔 부드러운 느낌의 몰레가 완성돼요. 이제 닭고기에 먹을 만큼의 몰레를 얹어서 약불에 한데 섞어 요리한 후에 또띠야에 얹어 먹는 거예요.



첫 홈메이드 몰레



남은 몰레로는 다음 날 아침에 칠라낄레(Chilaquiles)를 만들어먹었지요. 그동안 먹었던 멕시코 요리들이 발랄하고 활기찬 친구 같은 느낌이라면, 몰레는 마치 할머니가 해줄 법한 음식 같아요. 예쁘고 세련되진 않았지만 투박하면서도 정다운 토기 그릇 같은 느낌이랄까요. 한마디로 멕시코 요리의 진국은 몰레가 아닐까 싶어요. 멕시코 음식 기행을 떠나게 되면 각각의 도시의 유명한 몰레 집을 탐방해보고 싶어요.


"있지, 한국어 단어에도 Mole라는 말이 있거든? 몰래. Secretly라는 뜻이야. 꼭 그렇게 들리네"

"그럼.. 몰레 몰래 먹어요?"

"아 뭐야, 아재 개그!!!"


알피는 아재 개그라는 말을 몰레 덕분에 배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Instagram @jogum_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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