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jol con puerco | 돼지고기가 검은콩을 만나면
토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장을 보고 돌아온 뒤 낮잠을 늘어지게 잤어요. 일어나 보니 벌써 한낮은 지나고 오후의 햇빛이 감돌고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뭔가를 시작하거나 어딘가에 후딱 다녀오기에도 늦지 않은, 아직 하루를 더 잘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런 시간이니까요. 자는 알피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책상에 앉아 미뤄놓은 이메일 답장을 하고 전 날에 쓴 글을 손봤어요. 문득 부스럭 소리가 나서 보니 알피가 그새 주방에서 뭘 꺼내고 있어요. 다 먹은 줄 알았던 검은 콩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네요.
아직 눈도 덜 뜬 알피는 콩을 열심히 씻더니 냄비에 찬 물을 붓고 콩을 끓이기 시작해요. 라드 한 스푼과 큼직하게 썰은 양파 몇 조각도 함께요.
"오늘 뭐 먹을 거야?"
"콩"
"콩만 먹어?"
"네. 콩만 먹어요"
"나 배고파. 다른 것도 만들자"
"멕시코에서 먹을 게 없는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먹어"
"한국에서는 콩도 비싸. 됐고 아까 사 온 돼지고기도 같이 요리하자"
이번엔 제가 자진해서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 책을 뒤졌어요. 항상 뭔가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건 알피인데 이번엔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콩죽만 먹게 생겼으니 제가 나섰죠. 두꺼운 책에서 돼지고기(Pork) 부분을 찾아서 요리 이름을 하나씩 큰소리로 읊기 시작했어요.
"Cadillo de Puerco Duranguense.. 이건 뭐야? Carne de Puerco en Chile Colorado.. 이건 재료가 없고.. Puerco en Naranja... 이건 전에 만들었고.."
"조금 더 뒤로 넘겨서 Frijol con puerco 찾아봐"
냉장고에서 돼지고기를 꺼내며 알피가 말했어요.
"검은콩이랑 돼지고기? 딱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애초부터 이걸 만들 생각이었으면서 콩만 먹을 거라고 뻥친 것 같아요.
프리홀 콘 푸에르코(Frijol con puerco)는 멕시코뿐만이 아니라 브라질과 캐리비안 전역에서 많이 먹는 요리예요. 검은콩을 충분한 양의 물과 함께 적당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뭉근하게 끓이다가 돼지고기와 피망, 양파, 소금을 함께 넣고 약불에 계속 끓여요. 부드러운 검은 물이 보글보글 거리며 진하게 맛있는 냄새가 서서히 퍼져요. 원래는 에파조떼(epazote)라는 이름의 잎도 함께 넣어야 하는데 그건 구할 수가 없었어요. 알피가 그 특유의 맛은 빠질 거라고 했는데 전 애초에 먹어본 적이 없으니 빠져도 뭐 상관없지요.
이제 거의 완성되었으니 그 위에 올릴 살사를 준비해요. 필요한 건 토마토, 매운 고추 하나, 양파 정도예요. 먼저 토마토를 기름 없는 팬에 굽고 나서 까맣게 변한 부분의 껍질만 벗겨낸 다음 으깨요. 그리고는 기름 두른 팬에 양파를 볶다가 갈색으로 익기 전에 으깬 토마토랑 소금, 고추 통째로 넣고 오 분 정도 저으면 완성이에요.
저녁을 먹으면서 좋은 영화를 한 편씩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 날은 영화 대신 멕시코 요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골랐어요. 이제 검은콩과 돼지고기를 잘 섞어 한 국자 가득 떠내요. 까만 국물 안에 든 까만 콩, 그리고 까맣게 물든 돼지고기. 흠, 아무래도 사진빨은 못 받을 비주얼이지만 냄새가 끝내줘요.
상을 차리는 동안 알피는 고수(Cilantro)를 찹찹찹 썰고 잘 익은 아보카도도 잘라요. 아까 만든 토마토와 양파 살사를 한 스푼 넉넉히 올리고 그 위에 고수도 한 스푼, 아보카도도 함께 얹으니 알록달록해져서 먹음직스러워요. 잘 섞어서 한 입을 떠먹었어요. 소금 간이 잘 되어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콩과 부드러운 돼지고기의 맛이 입안에서 가득 퍼져요. 단백질 잔치네요. 잠깐! 알피가 외치더니 아까 직접 만든 란체로 치즈(Queso Ranchero)를 꺼내와서 한 스푼 얹어줬어요. 생김새는 리코타 치즈 같은데 끝까지 발효된 요거트 맛이라고 할까요. 그냥 먹으면 신 맛인데 이렇게 음식에 넣어서 먹으니 그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톡톡히 하네요.
한 그릇을 뚝딱 비웠어요. 이게 바로 어제예요. 오늘은 뽀요 삐빌(Pollo Pibil)을 만든다고 또 분주해요.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시인이 단어로 유희를 즐기듯 티타는 음식을 마음대로 요리하며 유희를 즐겼다"
제가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알피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르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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