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히타보다는 이게 진짜지

Cochinita Pibil | 유카탄의 맛

by 제이조이


이젠 아침저녁으로는 코가 살짝 시릴 정도로 추워졌어요. 제법 캄캄해진 저녁 여섯 시에 부엌에서 알피가 차를 끓이면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겨울이 오나보다 싶어요. 오늘 티타임의 주인공은 히비스커스예요. 자주색이 감도는 찻물 위에 오븐에 따뜻하게 구워둔 노르스름한 사과 조각들이 동동 떠있어요.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호호 불면서 마셔요. 선명하고 따뜻한 붉은 맛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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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멕시코는 색깔의 나라예요. 그리고 붉은색 아씨오떼 양념을 입힌 코치니따삐빌(Cochinita Pibil)은 정말 너무나도 멕시코적인 음식이고요. 짙은 주황빛이 나는 아씨오떼(Achiote) 씨앗은 옷감이나 음식을 물들이는 천연색소로 쓰여요. 특히 유카탄에서는 씨앗을 페이스트로 만들어서 음식의 양념으로 써요. 아주 강하진 않지만 특유의 향도 있구요, 맵지 않지만 진한 맛이에요. 멕시코 음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치니따삐빌이 바로 이 아씨오떼 양념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유카탄에서 즐겨먹는 대표적인 음식이지요.


"파히타랑 비슷하긴 한데 이게 진짜지"


알피가 말했어요. 사실 한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멕시코 식당에서 파는 음식들은 사실 멕시코 현지식이라기보다는 상당 부분 미국화 된 Tex-Mex인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아주 오래전에 이태원 타코벨에서 난생처음 타코를 먹어보고 "오 이게 바로 멕시코 음식이구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맥도널드의 타코 버전이었지요. 멕시코에 처음 가서 "여기엔 타코벨이 없네?" 했더니 알피가 깔깔거렸던 기억이 나요. 휴,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 음식을 타코, 퀘사디야, 브리또, 파히타로만 알고 있는 건 너무 아쉬워요. 그래서 코치니따삐빌을 꼭 소개하고 싶어요.






전 날 돼지고기 목살, 등심, 삼겹살 등 각종 부위를 사 왔어요. 돼지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썬 뒤 소금을 뿌려둔 다음 양념을 준비할 거예요.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에 따라 아씨오떼 씨앗, 큐민, 오레가노, 페퍼콘, 올스파이스, 올리브 오일, 마늘, 파프리카 가루, 식초를 물과 함께 블랜더에 갈아요. 이때 알피는 좀 더 선명한 색깔을 위해서 이미 만들어져 봉지로 파는 아씨오떼 페이스트를 조금 넣었어요. 멕시코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건데 확실히 씨앗만 갈아서 쓰는 것보다는 색깔이 사네요. 물론 화학조미료는 조금 들어가 있겠지만요. 이렇게 만들어진 붉은색 양념을 돼지고기 위에 뿌리고 24시간 동안 냉장고에 넣고 재우면 일단은 밑준비는 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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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기와 곁들여 먹을 살사를 만들 거예요. 오렌지즙을 길고 얇게 썬 적양파에 짜서 살짝 절여두는 건데, 이때 사실은 아무 오렌지나 쓰는 게 아니라 Seville orange라는 신 맛이 강한 스페인 오렌지를 써야 해요. 그런데 한국엔 캘리포니아 오렌지밖에 없으니 어쩌겠어요, 식초를 살짝 뿌려서 신 맛을 대신했죠. 그리고 보통 이 살사에 곁들이는 건 아바네로 고추(Chile habanero)예요. 쿠바 아바나에서 들여와서 아바네로 고추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남미에서는 가장 매운 고추일거래요. 알피는 이 고추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할머니가 떠오른대요. 유카탄 출신이신 할머니가 그 매운 고추를 아침부터 간식으로 드시곤 했다면서요. 청양고추를 다이너마이트 다루듯이 하는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속이 아파와요. 알피가 할머니 입맛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아까 말한 그 양파 살사에 이 아바네로 고추를 넣은 게 Salsa xnipec이에요. 너무 매워서 개처럼 헥헥거리게 된다는 의미래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바네로 고추는 한국에 없지만 예전에 해외배송으로 시켜둔 아바네로 소스가 있어요. 그걸 몇 방울만 뿌렸죠. 그리고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 오레가노를 추가하면 살사가 완성이에요.




IMG_8830.JPG 아바네로 고추 대신 아바네로 핫 소스. 진짜 맵다




프라이팬에 전 날 양념해둔 고기를 익히는 동안 빠누쵸(Panuchos)를 만들 거예요. 빠누쵸는 옥수수 또띠야 속을 갈라 그 안에 양념해서 끓인 콩을 얇게 펴 바른 거예요. 꼭 설탕 대신 콩이 들어간 호떡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보라색 찰옥수수를 갈아서 만들었더니 쫀득하게 맛있는 빠누쵸가 완성됐어요. 이제 그 위에 잘게 찢은 돼지고기(cochinita)를 듬뿍 올리고 아까 만든 적양파 살사를 올려요. 새콤한 적양파가 아씨오떼 옷을 입은 돼지고기를 만나니 아삭하면서도 풍성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워요. 게다가 직접 만든 빠누쵸는 따뜻하고 쫀득했고 그 안의 고소하고 짭조름한 검은콩이 부드러운 조합을 이뤄요. 각기 다른 색깔들이 저마다의 맛을 뽐내는 느낌이에요. 매일 먹어도 안 질릴 맛이에요. 그래서 다음 날에는 밥과 함께 또띠야에 싸 먹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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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8847.JPG 홈메이드 빠누쵸에 얹어먹는 코치니따삐빌




내년쯤에는 알피 할머니의 고향 유카탄에 꼭 가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유카탄에 아주 유명한 코치니따 삐빌은 직접 농장에서 키운 흑돼지를 잡아서 만들더라고요. 유카탄에 가면 코치니따 삐빌도 매일 먹을 거고 아씨오떼 양념이랑 페이스트도 많이 사 올 거예요. 그전에 알피에게 제주도 흑돼지의 맛도 한 번 보여줘야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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