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 발견한 낯선 나에 대하여
2023년 2월 23일, 생애 첫 여권이 만료된다. 펜데믹으로 해외로 나가는 일이 어려워진 뒤부터는 여권을 들춰보지 않은지도 한참이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발급했던, 어학연수를 위한 비자를 끝으로 (구)여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VOID라고 찍힌 표지부터 찬찬히 넘겨봤다. 세상에 불만 많은 범죄자의 머그샷 같아 여행을 동반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여권 사진(10년 전 카메라 앞에서 왜 눈을 저렇게 떴는지 모르겠다),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갔던 날 항공사 직원이 서명하라며 건넨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었던 이름 석자,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한민국 출입국 도장, 그 뒤로 이어진 여행의 기록.
외국으로 떠나는 것은 보통의 결심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비행기 값부터 숙박비, 식비, 쇼핑을 비롯한 온갖 소비에 필요한 돈을 준비해야 한다. 돈만 있어서도 안된다. 산 넘고 물 건너 머나먼 곳으로 떠났으니 미련 없이 머물러야 할 터. 일주일에서 열흘, 못해도 3일 정도의 시간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과 돈은 보통 반비례한다. 시간이 있다면 돈이 없고, 돈이 있다면 시간이 없는, 어쩌면 둘 다 없을지도 모를 비극을 꾸역꾸역 타개하고서 긴긴 여정을 떠났던 지난날의 나. 설렘과 싱그러움을 기꺼이 품었던 사람이 나였음을.
여권을 만들고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중국어는커녕 '니하오' 한 마디도 못하는 주제에 겁도 없이 혼자 운남성을 갔더랬다. 10시간 넘는 환승 시간을 기다리는 경유지 공항 벤치에 누워 단잠을 퍼질러 잤다. 침대기차에 몸을 싣고 해발고도 2,400m 고성이 있는 도시에 갔다. 내 말을 알아듣든 말든 아무나 붙잡고 영어로 길을 묻고, 화장실을 묻고, 와이파이 암호도 물었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몇 차례 더 중국에 갔고,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도 갔다. 이토록 씩씩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나였다.
여권을 만들고 가장 처음 방문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스물두 살의 나는 정말 이상한 연애를 했다. 사실 연애라고 부를 수 없는,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고소를 했어야 마땅한 이상한 사람과의 교제였다.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고, 학교 가는 길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수업을 마치면 그 누구보다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어느 날 밤에 무릎을 꿇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했다.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속 리즈처럼 말이다.
대학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학기의 기말고사를 치르고 곧장 휴학계를 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 무질서와 기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는 유일한 덕목은 '아름다움'이라 믿었던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가면 내 마음도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곳에 가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괜찮았던 것 같다. 괜찮아지려면 뒤를 돌아볼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봐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어찌할 수 없어서, 혹은 나도 어쩔 수 없어서 못내 자기를 비하하느라 깊어지는 밤에 불현듯 떠오른 여권. 엿새 뒤 새 여권을 수령하러 오라고 한다. 그 사이 난 앞으로 찍게 될 도장만 생각하기로 했다. 카타르 월드컵 주제곡을 들으며 발끝을 까딱일 것이고,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으며 프랑스 남부는 얼마나 따뜻할지 상상할 것이고, 사천성에서 먹는 마라샹궈를 기대할 것이고,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를 틀어놓고 마음껏 설레할 것이다.
새 여권이 나오면 더 많은 여행을 할 것이다. 타국에서 더 많은 나를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