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것이 창피하다
쓰는 것이 창피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글을 꽤 썼었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줄 축하 카드를 쓰는 것이 좋았고, 미루고 밀리는 압박 속에서도 일기 쓰기 방학 숙제는 싫지 않았다. 글짓기 대회에 참가하겠다며 먼저 손을 번쩍 들기도 했고, 백일장에 입상해 조회대에 올라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받기도 했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지금 글 쓰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하루에도 십수 통 오가는 업무 메일을 시작으로 온갖 제안서, 기획서, 보고서를 기꺼이 쓴다. 다만 내 감정과 속마음을 철저히 배제하거나(필요 시에만 아주 완곡하게 내비친다), 명사형 어미 ‘-ㅁ’ 로 끝맺는 이른바 ‘음슴체’로 이루어진 글이라는 것이 특징일 뿐이다.
생각을 글로 옮기기를 꺼려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단어 몇 개로 구성된 짤막한 구로 생각을 빗대다가, 그것마저 꺼려질 땐 이모지 두어 개만 남기기 일쑤였다. 한때 좋아했던 글쓰기가 산문이었다면, 다 커서는 함축의 미학에 눈을 떠 운문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도 아니다. 짤막한 구마저도 온라인 상에서 유행하는 밈을 따라했으니 말이다.
우연한 기회에 꾸준히 쓰는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출판을 준비하며 매주 원고를 쓰는 요즘. 한때는 열심이었지만, 지금은 창피해서 꺼리고 있는 ‘쓰는 행위’를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키즈로 나고 자라 월드 와이드 웹 어딘가에 익숙하게 쓰곤 했던 글. 그러나 훗날 ‘흑역사’ 혹은 ‘오글거린다’ 따위의 말로 평가받고 말았던 씁쓸한 말로. 지금도 그 글이 드넓은 정보의 바다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전하고 싶은 생각과 쓰고 싶은 글은 참 많다. 그럼에도 솔직함과는 거리가 먼 음슴체와 낱말 몇 개를 이어 붙인 문장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훗날로부터 상처받기 싫은 이 순간의 여린 마음일 것이다.
이제는 도전해보려고 한다. 잊힐 권리가 사라진 지금, 과거가 늘 세련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보기로.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실수를 거듭하며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죽 끓듯 한 변덕을 구태여 흔적으로 남기는 일. 나에게 ‘쓰기’란 그것이다. 평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으면서 평가받는 것은 몹시도 두려워하는 이중성처럼, 지금의 도전도 돌아서면 다시 창피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창피함을 무릅쓰고 지금의 나를 믿으며 쓰기로 했다. “그때 썼던 글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고 뻔뻔하게 말하리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