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입춘(立春)
"나는 상상할 수가 없어."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친구의 목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들린다.
조금은 지나친 걱정이라 생각이 들어, 나는 친구에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벌써부터 걱정해? 남자애가 된 것도 아닌데, 상상력이 너무 지나치군." 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언니, 지난번에 지 아빠 팬티를 입겠다고 난리를 쳤다니까! 내가 못살아.."
전화기 너머의 친구는 나와 얘기도 잘 통하고 성격도 비슷해서 멀리 살지만 가끔 얘기를 나눈다.
그 친구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 둘 있는데, 첫째는 얼굴도 눈에 띄게 이쁜 데다가 꾸미는 걸 좋아하는 매우 여성스러운 성격이다. 반면 둘째 딸은 일종의 톰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활동적이라 축구부에서 골키퍼도 맡고 있는 씩씩한 성격의 아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가 자꾸만 남자옷만 입기를 원하고 행동도 태도도 자꾸 남자를 흉내 낸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아이가 자라서 성별을 바꾸고, 호르몬주사를 맞고, 수염이 거뭇거뭇한 얼굴로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오는 상상만 해도 잠을 못 이룬다는 것이었다.
뭐라 대답할 수 없는 친구의 걱정에, 문득 조카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으로 무장을 하고, 조금이라도 핑크색이 묻어나지 않는 것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그 꼬마가 이제는 다 커서 공대생이 되었다. 여자 공대생이 된 나의 친애하는 조카는 핑크색은커녕, 세상이 전부 암울함에 잠긴 듯 무채색만 고집한다.
그뿐인가? 어린 시절 보자기를 온몸에 휘감고,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 앞에서 춤추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둘째 조카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다 같이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특히 노모는 혀를 차며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런다니.." 하시곤 했다. 하지만 최근 변성기가 오더니 멈출 줄 모르는 왕성한 식욕울 자랑하는 평범한 중학생이 되었다.
며칠 째, 외장하드를 정리하다가 튀어나온 그 이름 'Kate Tempest'.
나는 오래전에 spoken word라는 장르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한 아티스트의 음악은 투박하지만 날카로운 쇳소리가 매력적이었고, 냉소적이지만 깊은 생각을 들게 하는 가사가 강한 흡입력이 있었다. 아티스트의 외모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항상 마주치는 틴에이저처럼 오렌지색에 가까운 노랑머리에 짧은 코, 주근깨 가득한 얼굴 가운데 앙 다문 입술의 얼굴이 마치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 가사에, 목소리에 빠져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에 감탄하며 찾아본 그녀는, 이제 '그'가 되어 있었다. 앳된 말괄량이 소녀 같던 그녀가, 'Kae Tempest'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순간, 친구가 걱정하던 일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며, 일종의 알 수 없는 탄식을 내뱉어 버렸다.
어떤 일에는 자잘한 걱정과 근심을 쏟아내지만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은 겨우내 땅 속에서 싹을 키우다가 봄에 갑자기 솟아나는 새싹처럼, 이유는 없다는 듯이 일어나기도 한다. 오늘 아침, 빈 화분인 줄 알았던 흙을 뚫고 돌돌 말린 이파리가 고개를 쳐들기 직전인 몬테스테라의 작고 연한 잎처럼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절기 입춘(立春)이 소리 없이 전해주는 듯하다. 더디게 조용히 어둠 속에서 태양을 향한 나선형 움직임을 위한 저장의 시간을 보내고 불쑥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