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첫 집을 구하기 위한 여정
아빠가 서울에 왔다. 이 날은 아빠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역을 밟은 날이다. 25년 전 아빠는 아기였던 나, 동생을 임신해 배가 부른 엄마와 외가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무궁화 열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2011년 4월, 나는 취직을 하면서 서울에 왔고, 자녀가 3명 있는 삼촌 집에서 3개월 정도를 신세 졌다. 삼촌 부부 덕분에 매 끼니를 챙겼고, 시끌벅적 3남매의 부산함에 서울살이의 시작은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중반,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며 지친 나에게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은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더 이상 객식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저기 아빠, 혹시 얼마 정도 보태줄 수 있어? 아니면, 빌려라도 줄 수 있어?”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매물들의 시세를 살짝만 둘러보아도 서울에서 방을 구하는 것은 참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내 수중엔 부산에서 아르바이트와 짧은 회사 생활로 벌어놓은 500만 원이 전부였고 이것으론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의 집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의 전화에 아빠는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리곤 질문의 대답 대신, 주말에 서울에 올라갈 테니 같이 집을 보러 다니자고 했다. 집을 구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단 이틀. 우리는 그 안에 내가 살 집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토요일 아침, 아빠는 서울에 올라왔고 우리는 삼촌으로부터 자취인들이 많고 가격이 적절하다고 추천받은 관악구와 신림, 사당을 먼저 돌자고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둘째 날은 회사와 가까운 분당, 성남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기로 스케줄을 짰다. 우리 부녀는 낯선 서울의 버스와 지하철을 함께 타는 소소한 여행을 시작했다. 아빠와 단둘이 1박 2일을, 그것도 하루 종일 함께 돌아다니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아빠와 단 둘이서 카페를 가고, 식사를 해야 한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 두 사람의 짧은 여행은 어색함과 불편함, 다툼의 연속일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와 단 둘이서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번이 처음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때 1번, 중학교 때 1번 정도 단 둘, 부녀가 함께한 날들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앞선 걱정으로 우리의 여행을 바라보는 이유는 타당하다. 초등학교 때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남포동에 위치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갔다. 지금은 상권이 다 사라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책방들은 줄을 지어 열려 있었고 쏟아질듯한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사방에 삐뚤빼뚤, 혹은 단정하게 쌓여 있는 책들의 풍경은 세상 어느 도서관과 서점을 가도 느낄 수 없는 손길의 따스함과 세월의 멋짐이 배어있었다. 그때 맡았던 쿰쿰하고 고소한 책의 향기는 지금도 서점에 갈 때마다 모락모락 눈앞에 풍경으로 피어오른다. 우리는 참고서를 몇 권 사고, 근처 문구점에서 참고서를 포장할 포장지와 테이프를 샀다. 책으로 쌓아 올려진 놀이공원에 온 나는 마냥 신나게 책방을 뒤집고 다녔다. 조그마한 내가 여러 서점 속에 숨어드는 탓에 딸을 계속 잃어버리고, 찾아 헤맨 아빠는 먼지투성이인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툭하면 눈물을 보였고 울먹이는 나를 달래고자 아빠는 길거리 노점에서 뜨거운 물떡과 말랑한 어묵을 하나씩 사주었다. 그럼에도 부녀는 완전한 화해는 하지 못한 체 어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중학교 입학 직전, 아빠와 나는 구두 한 켤래를 사러 서면 롯데 백화점을 간 적이 있다. 내가 입학하는 여자 중학교는 귀밑 3센티 단발에 운동화가 아닌 가죽구두를 꼭 신어야 했다. 아빠는 중학교 3년, 혹은 고등학교까지 총 6년을 신어야 할 수도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구두는 좋은 걸로 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곤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출처모를 백화점 상품권을 서랍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우리는 롯데 백화점 금강제화에서 검은색 로퍼 하나를 사고 서면 일번가에서 우윳빛의 따끈한 곰탕을 먹었다. 아빠는 깍두기 국물을, 나는 사리를 추가했다. 이렇게 깔끔 담백하게 끝이 났으면 좋을 하루였는데. 어린 나는 서면 지하상가를 지나가다가 면바지 하나와 티셔츠 하나를 사달라고 떼를 썼다. 아빠는 난감한 얼굴로 오늘은 구두를 사러 왔는데 뭘 더 사려고 하냐고 화를 냈다. 지하상가에서 파는 옷는 기껏해야 1~2만 원 사이였다. 하지만 아빠의 실업과 엄마의 긴 아르바이트 끝에 작은 가게를 시작한 우리에게 비싼 구두를 사고 외식을 한 것은 특출 난 지출이었다. 나는 늘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출처를 알 수 없는 옷 혹은 교복만을 입고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마음에 들었던 타 학교 남학생이 주말에 함께 도서관이나 독서실을 가자고 물어도 나는 입고 나갈 옷이 교복뿐이라 어쩔 수 없이 거절했던 적도 있다. 분명 아는데, 상황을 너무 잘 아는데, 나는 길 한복판에서 아빠에게 계속 소리를 지르며 때를 쓰고 울었다. 어린 나의 바둥거림과 패악에 화가 난 아빠는 나를 길에 세워두고 앞선 많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나는 그제야 아빠 미안해 잘못했어를 외치며 희미한 아빠의 뒷모습을 따라 달렸다.
집을 보러 돌아다닌 그날도 결국 이 공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아빠와 크게 싸웠다.
명백한 이유는 서울의 집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지만 나는 집을 보는 내내 속으로 아빠를 탓했다. 보증금이 거의 없는 나에게 서울의 집은 감당하기 힘든 월세를 가졌거나, 기형적으로 작고 낡은 모습이었다. 대기업 계약직 사원이었던 내가, 언제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내가 이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갑자기 쏟아진 불안감은 멈출 줄을 몰랐고 월급에서 월세를 차감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셈을 하느라 끝없이 머리가 굴러갔다. 그렇게 뭉쳐 구르던 불안은 내 안의 적립된 불만을 위태롭게 감싸고 있던 껍질 하나를 부쉈다.
아빠는 평소에도 말이 많고 잔소리가 잦은 사람이었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믿는 사람. 여러 사람이 모이면 꼭 훈수를 두는 사람. 그래서일까 25년 만에 온 낯선 서울에서도 아빠는 끊임없이 부동산 사람들 앞에서 부동산 시장에 대해 말을 더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비싼 시세와 좁고 더러운 방들은 나만 초라하게 만든 건 아니었나 보다. 기세 좋게 훈수를 두던 아빠는 방문하는 부동산의 수가 늘어날수록 말수가 줄어갔다. 이러다간 또다시 내가 먼저 눈물을 쏟거나 화를 내며 싸움을 걸 것이 분명하다. 내 눈가와 입술 사이에 틈이 생겨나려는 찰나, 빠르게 이 틈을 메꿔 상황을 잠재워야 한다. 새로운 부동산으로 가기 전 나는 아빠의 팔을 잡아 이끌어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새하얗게 칠해진 작은 카페의 카운터 옆 진열대에는 윤기 나는 브라우니가 반듯이 놓여있었다. 나는 당분을 보충하고 부녀의 기분을 풀기 위해 커피 2잔에 브라우니 하나를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둘이서 카페를 온 것도 처음이었다. 아빠는 브라우니라는 걸 먹어본 적은 있을까? 평소 아이처럼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내가 서울에서 번 돈으로 커피와 브라우니를 주문하는 것은 나의 미숙하고 작은 사과 표현이었다. 나는 부디 브라우니가 우리 사이의 긴장을 풀 정도의 엄청난 맛집이길 간절히 바라며 접시를 옮겼다.
“이건 얼마니?”
아빠는 테이블 위의 브라우니 맛을 보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며 가격을 물었다.
“이거 6천 원이야.”
“이 조그마한 게 6천 원이라고? 다음부턴 이런 거 시키지 마라. 돈 아깝게.”
아빠의 목소리는 무척 컸고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 안은 아빠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야속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나의 6천 원어치 사과는 빠르게 거절당했고 우리는 그 후에도 집을 구하지 못했다. 그저 어색한 긴장감만 가득가득 싸들고 삼촌 집으로 돌아갔다.
둘째 날, 우리는 회사와 가까운 복정과 분당 인근 경기도 지역의 집을 돌아봤다. 삼촌집에서 가까운 복정의 집들을 먼저 둘러보다 매물이 많지 않아 결국 회사 인근의 집들을 보러 정자동으로 갔다. 아빠는 분당까지 온 김에 내가 다니는 회사를 한번 구경해보고 싶다고 했다. 주말, 그리고 외부인이라 들어갈 순 없지만 커다랗게 빛나는 녹색의 회사 건물을 보며 아빠는 한국 IT산업의 발전과 인터넷의 발전이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더 나아가 인터넷 회사가 이렇게 까지 크냐며 애국심과 유사한 자긍심을 내비쳤다. 박봉의 계약직, 팀원들의 눈치만 보며 사는 나는 이 회사의 성장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줬는지, 무엇이 그를 자긍심 넘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동산을 3 군대를 돌아보기 나니 점심시간이 됐다. 나와 아빠는 점심으로 비빔밥과 콩나물 국이 함께 나오는 백반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 전에 회사 사람들이랑 몇 번 왔었는데 맛있었어.”
“서울 물가 참 너무 하다 싶더니 경기도도 이러냐? 겨우 반찬 몇 개 가져오고 이 가격이라고?”
나는 더 이상 대꾸하기 싫어 숟가락으로 콩나물 국을 뒤적거렸다. 회사 사람들과 자주 오는 곳인데, 쪽팔리게 큰소리로 가격을 운운하는 아빠의 모습에 혹여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볼까 부끄러웠다. 우리는 몇 개의 좁고 더러운 골목을 미로처럼 더 이상 우리를 만족시킬 집 따위는 없다는 사실과 끝끝내 협의했다. 그날 우리는 정자동 원룸촌에 위치한 북향의 빛이 들어오지 않고 구석구석 곰팡이 핀 작은 원룸을 계약했다.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아빠는 저녁도 먹지 않고 부산으로 바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아빠, 밥이라도 먹고 가지.”
“됐어, 지금 내려가도 부산 도착하면 한밤중이야. 이사할 때 한번 더 올라올게. 어서 들어가서 쉬어라”
서울역까지 아빠를 배웅하겠다는 나를 기어코 말리는 아빠의 고집에 우리는 수서역 지하철에서 이별을 했다. 우리의 짧은 모험은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 형태와 모습이 낡고 닳아 기쁘지 않은 기묘한 성취감이 감돌았다. 아빠와 나는 찹찹한 마음을 담아 서로를 어색하게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아빠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3초 정도 움직임 없이 뒷모습만을 보이다 느릿하게 탑승 방향의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때 아빠는 울고 있었다.
떠나는 아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아빠의 낡은 점퍼는 밤 서리에 추울 것 같아 걱정이 됐다. 나는 아빠가 사라진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5분 정도 멍하니 개찰구를 바라보다 삼촌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를 탔다.
친척들은 나를 볼 때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물었다.
“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 잘 지내고 있지?”
나는 항상 생각한다. 아빠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이 고생도, 가난도 아빠의 실패도, 마음 편하게 탓하고 욕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욕할 수도 없게 만들었을까. 아빠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늘 나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만들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을 주어 내가 참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두꺼운 방패를 든 사람.
그날 밤 나는 아빠와의 기억을 천장에 떠올려보았다. 어느 토요일 밤, 아빠와 함께 ‘로마의 휴일’을 본다. 아빠는 오드리 헵번의 팬이었고 딸을 낳으면 꼭 햅번 스타일의 머리를 해주고 싶었다고 수줍은 듯 내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빠가 방금 산타할아버지한테 전화를 한통 받았어. 혜림이가 갖고 싶다던 똘똘이 인형은 비싸서 다른 친구들 선물까지 사기 힘들대. 대신 혜림이는 착한 어린이니까 몇 달 후에 선물을 보내 주신다네? 그래서 아빠한테 대신 다른 선물을 먼저 전해달라고 해서 아빠가 새롬이 인형을 샀는데 괜찮지?”
아빠 차 안에서 함께 불렀던 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 비틀스의 ‘Girl’, 아빠가 즐겨 틀어놓았던 사이먼 앤 가펑클 ‘Scarborough Fair’. 아빠 생일에 생애 처음으로 음반을 샀고 그 앨범은 비틀스의 ‘1’이었다. 이걸 내밀었을 때 아빠의 눈은 본 적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몇 달을 홀로 여행 다닐 때 아빠는 내가 부럽다며 언젠가 본인도 혼자 동유럽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문자로 보냈다.
58년 개띠, 아빠는 본인을 이야기할 때면 수식어처럼 58년 개띠,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할아버지의 집에서 첫 딸을 받고 약 100일이 될 때까지 딸에 대한 육아일기를 썼다. 마당에 앵두나무가 있는 작은 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살다 분식가게에 딸린 단칸방으로 이사가 4 식구가 살았다. 그러다 신도시가 뜬다는 소문에 아빠는 덜컥 빚을 우리가 살 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 외 신도시의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 아파트는 가격이 오르기는커녕 반값으로 떨어졌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이렇게 잘생겼으면 배우를 했어야 했는데 우리 아빠는 직업을 잘 못 택했네!! 그래서 이래.”
아빠가 기운 없어 보일 때면 나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낡은 점퍼가 아닌 멋지고 비싼 정장을 입고 고급스러운 구두를 신은 아빠를 상상해본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웃는 그런 모습. 아빠는 이 모습이 원래 모습인 듯 너무 잘 어울리고 멋이 있다.
아빠는 말수가 많은 편임에도 사랑과 미안함은 절대로 말로 표현하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나에게 미안한 일을 부탁하거나 알려야 할 때, 자신의 입이 아닌 엄마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하는 치사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얄미운 사람 같으니. 정말 얄미워 죽겠다.
아빠는 나를 사랑한다. 신기할 정도로 이 사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냥 새싹이 자라듯, 햇볕이 따뜻하듯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하게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만약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인생을 혹은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더 이 기적여지고 강해졌을까? 나는 이 감정이 완벽한 ‘애증’이란 단어의 뜻이란 답을 내리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