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가 살아가는 세상
삶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면 그 인간 M을 잘못 본 겁니다. 이런 유형은 바쁜 일에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하고 큰 프로젝트를 다루는 부담을 피하기 위해 지엽적인 일에 매달린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작은 이익에 이끌리는 거지요.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라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고집스러움과 저항이 있어요.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좋은 기분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저항하는 처세법이라고나 할까요. – 은희경 ‘지도 중독’-
나는 완전히 지엽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고민과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일을 늘림으로써 나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너무 정확하게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터에 익숙해진 세대인 나는 조금의 비켜남이나 흔들림, 흐트러짐에 취약해져 버려 금세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읽다 내가 나이가 듦에 있어, 그리고 30대 여자가 겪는 여러 사회적 색안경들 속에서 나 자신을 조금씩 잊어가고 불안해 길을 잃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어리고 예쁜 ‘애늙은이’였고, 조숙하고 어른스러우며 아는 게 많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지금 30대의 나는 나이에 비해 조금 어려 보이지만 그 나이에 비해 현명함과 노련함이 부족한, 정신은 아직 어린 시절에 멈춰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인가 하고 생각하면 또다시 불안함이 물씬 온몸으로 불어온다.
언젠가 나의 외모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미학적 견지에서 더욱더 빠르게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배포가 필요한데 한국사회에서 나는 끊임없이 시간을 멈추기 위해 노력하며 아등바등하고 있다. 불안, 나의 머리와, 마음과 달리 불안은 홀로 끊임없이 역동한다. 이 불안의 기원에 대해, 그 불안과 싸우기 위해 나는 내 과거를 되짚고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부여하여 내 안에 나를 감싸고 끊임없이 따뜻한 손으로 만져준다. 나는 매일 싸우고, 쓰다듬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라고 했다. 나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 속에 필터를 씌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이 불안의 기원은 무엇일까.
PTA의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주인공 다니엘(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발광하는 인생 속에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가족, 즉 사랑의 부재로 인해 그걸 부정하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거나 죽인 후 모든 것이 끝났다고 비명을 지른다. 자신에겐 사랑이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가스 라이팅 한 그 처럼, 나는 사랑과 행복으로 충족돼 있다고 스스로를 가스 라이팅 했던 걸까. 불안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돌아갈수록 나의 사랑과 행복이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나의 코어는 사랑이고 세상 무엇보다 사랑이 없으면 인생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라 말하지만, 나는 다니엘과 반대로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세뇌해왔던 건 아닐까. 발화하는 고독 속에 뒤늦게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춘기 소녀가 된 나는 정체성의 혼란 속에 매일매일 두근 두 근 한 심장을 멈추기가 어렵다.
며칠 전 부모님은 처음으로 슬슬 선이라도 볼래?라고 물어보았다. 이제 부모님이 규정해놓은 선을 내가 넘어가고 있는 것일까 싶었다. 굉장히 이상하고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맞아. 나 어른이지. 자각하지 못한 어른. 아직도 영혼은 사랑이란 꿈속에 갇힌 사람.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내비게이터를 벗어나 어떠한 변수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내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세상은 묘비명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럼에도 내 삶의 코어는 사랑이라고 계속해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믿고 싶다. 언젠가 이 마음에도 권태로움이 오고 인생의 내비게이터를 벗어난 나를 후회하게 될까? 오늘도 위선적이지만 위악적인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계속 사회가 만든 선 밖에서 꾸준히, 끊임없이 내 안의 사랑을 슬픔 없이 지켜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