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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Oct 25. 2015

덴마크 국민들의 어마어마한 왕실사랑

오늘 하루는 나도 프로 관광객.

독일에서, 특히 친구의 집에 있을 땐 늦잠도 많이 자고 느릿느릿 무척이나 게으른 하루를 보냈다. 관광객이라기보다 진짜 옆동네 친구 집에 놀러 온 느낌이랄까. 사실 70일 여행 중정말 며칠을 빼곤 나는 언제나 게으른 옆동네 친구 모드로 여행을 했다. 하지만 코펜하겐에서의 둘째 날은 그 며칠 안 되는, 손꼽히게 부지런히 ‘관광’을 한 날이다. 나는 스스로를 ‘프로관광객’이라고 칭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획엔 스케줄에 따라 여기 번쩍, 저 기번 쩍 홍길동처럼 돌아다녔다. 론리플래닛에서 추천한 코스대로, 그리고 비싼 북유럽에서 최대한 교통비를 아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는 아침부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예상과 달리 코펜하겐의 날씨는 이른 아침부터 무척이나 뜨거웠다. 북유럽에는 여름이 거의 없다고 들었기에 가을 옷을 준비했던 나의 짐들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분명 지난주까지 추웠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북유럽의 여름은 매우 짧고 3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나는 마침 북유럽의 여름이 막 시작할 때 코펜하겐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 한번 겪었던 열사병을 예방하기 위해 텀블러에 물을 미리 가득 채웠고 어제 미리 구입했던 과일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첫 번째 장소로 숙소에선 좀 떨어진 ‘인어공주 동상’을 선택한 나는 위장술을 시연하는 닌자라도 된 듯그림자를 찾아 그 아래에 쏙쏙 숨어 들어가 길을 걸었다. 중간에 길을 조금 헤매긴 했지만 30여 분 만에 인어공주상에 도착했다. 

“우와, 작다!” 

사전에 호스텔 룸메이트들로부터 인어공주상이 매우 작아 실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지라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인어공주는 정말 조그만 어린아이처럼 작았다. 그리고 그 주변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와, 내가 덴마크에 오긴 왔구나. 저 사람들 좀 봐.” 


나는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에 놀라 인어공주상에 가까이 다가가진 않고 조금 뒤로 물러서 사람이 없는 조용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가방에서 요구르트와 과일을 꺼내 주섬주섬 가벼운 식사를 하며 계속해서 인어공주상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사람들 사이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스타’같은 인어공주를 보니 기분이 미묘해진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떠난 안데르센이 하늘에서라도 이 모습을 꼭 보았길 바랬다.


안데르센은 항상 자신이 죽은 '후'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 자체 라던지 사후세계가 아닌 자신의 죽음 뒤의 시간, 즉 '잊혀짐'을 두려워했다. 사실 그 ‘후’의 시간은 당사자는 느낄 수고, 볼 수도 없는 죽은 자에겐 공간 너머의 일 이거늘, 그는 그의 실체적인 존재가 사라진 후에도 무형의 그의 존재가 실제 하길 원했던 것 같다. 그는 죽음 후 모두에게 잊혀 완전히 자신이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사라진 이름의 블랙홀에 빨려 드는 죽은 별과 같은 '소멸'을 두려워했을까? 


어쨌든 안데르센의 걱정은 완전히 기우에 불구했다.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저렇게 인어공주를 만나러 찾아주니. 만약 이 모습을 지켜본다면 그는 엄청나게 행복하겠지. 그런데 수많은인파 속의 인어공주의 모습을 보니 미약하게 마음이 떨려오고 슬픔이 잔잔한 파도처럼 쓸려온다. 내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소녀가 수백 명 앞에서 홀로 처량히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내 마음을 시리게 하고 아프고 붉게 눈가를 건드린다. 

내 오랜, 어린 시절의 가련한 공주님, 안녕.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뜨거운 햇빛 아래 잠시 몸을 말렸다. 아, 이제 날씨가 정말 뜨거워졌다. 그리곤 저 멀리, 아까 급히 오느라 지나쳐온 계피온 분수로 걸어가 차가운 물줄기들이 만들어내는 옅은 안개에 뜨거운 햇빛을 잠시 잊어본다. 



북유럽 신화에는 오딘과 토르, 로키 등의 유명하고 재밌는 일화가 많지만 신화 초반에 등장하는 덴마크 건국 신화는 참으로 재미가 있다. 지혜롭지만 언제나 더 많은 지혜를 갈구하고 욕심 냈던 스웨덴의 왕이 일반인 차림으로 새로운 지혜를 찾기 위한 모험에 나섰다. 그러다 해가 지고 밤을 보내기 위해 움막인가, 동굴인가 거기에 들어갔더니 웬 절세 미인이 단아하게 앉아있었다고 한다. 왕은 그녀에게 자신의 지혜를 뽐내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 미녀는 도무지 웃질 않고 시큰둥하기만 했다. 왕은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재미 난 이야기를 해 드리죠.”

그런데 왠 일, 그녀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후 왕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너의 이야기가 훌륭하니 상을 주마. 하루 동안 황소로 쟁기질해서 나아간 땅 만큼 너에게 땅을 주마.”

하지만 이건 왕의 엄청난 실수였다. 그 미녀는 다름 아닌 계피온의 여신이었다. 그녀도 참 야속한 게, 자신의 아들들을 황소로 만들어 하루 동안 엄청난 양의 땅을 떼어갔고 그게 코펜하겐의 셀린 섬이라고 한다. 


신화는 재미가 있다. 평소에도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켈트 신화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북유럽 여행 전 북유럽 신화에 관한 책들을 읽고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보이는 것들이 낯설지만은 않고 재미가 있다. 나는 혼자 히죽거리며 계피온 분수를 바라보다 문득 근위병 교대식이 몇 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리나케 아말리엔보르 궁으로 달려갔다. 



아말리엔보르 궁에 도착하고 보니 교대식이 아직 1시간 남짓 남았고, 내가 시간을 착각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잠시 궁궐 앞 광장을 한 바퀴 돌다 궁전 안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침에 구입한 코펜하겐 카드의 첫 개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내민 후 궁 안으로 들어갔다.   


덴마크 국민들의 왕실사랑은 어마어마하다. 1794년 이후로 왕족들의 실제 거처로 사용되고 있는 아말리엔보르 궁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왕족과 근위병을 보기 위에 방문한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거기다 현 왕세자인 프레드릭과 왕세자비 메리의 세기의 신데렐라 러브스토리로 인해 전 세계의 관심과 사랑이  더욱더 쏟아지고 있다. 



아멜리엔보르 궁 안에서 이들의 결혼식 사진이 크게 전시되어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설명을 읽다 내 옆에 서 사진을 감상하던 덴마크 여성이 함께 온 지인에게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결혼할 때 전 하필 미국에 있었어요. 지금도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요. 그리고 더 화가 나고 웃긴 게 뭔 줄 아세요? CNN에선 이들의 결혼 소식을 단 5초만 보도했어요. 믿을 수가 없었죠. 5분도 아니라 5 초라니!!!! 덴마크 왕자가 결혼했습니다. 끝. 전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다 났어요. 말도 안되지 않나요? 제 엄마랑 동생은 결혼식 퍼레이드를 직접 봤다 구요!! 부러워 죽겠어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나도 모르게 번져가는 미소를 급히 가리고 나는 다른 전시실로 빠르게 발길을 옮겼다. 덴마크 국민들의 왕실 사랑이 어마 어마 하다는 걸 직접 목격하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만약에 왕실이 존재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경복궁에 아직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가 산다면?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하다. 



어느덧 시간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급히 궁 밖으로 나왔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성벽의 벽돌처럼 촘촘히 늘어서 근위병으로부터 이 성을 지키는 듯한 느낌 마저 들었다. 저 멀리 기합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교대식은 이미 시작한  듯했다. 나는 군중 속에 몸을 밀어 넣어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온몸을 위로 늘리는데 집중했다. 발가락을 들고 다리를 최대한 뻗고, 목을 높이 뺀다. 보초를 서고 있는 초식동물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같았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리 쿵, 저리 쿵, 온몸을 부딪히다 끝내 교대식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사람들 밖으로 몸을 꺼냈다. 괜히 아쉬워 캥거루처럼 온몸을 폴짝였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까만 군모와 파란 군복의 어깨 장식뿐이었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성문을 빠져 나왔다. 


갑자기 피로가 발끝에서부터 엘리베이터처럼 다리로, 허리로, 어깨로, 머리로 순차적으로 올라왔다. 아마도 뜨거운 태양 아래 평소답지 않게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일 것이다. 마치나의 발걸음이 그림자에 의해 뒤로 끌려가기라도 하는 듯 갑자기 나의 발은 한치 앞을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결국 나는 매우 천천히, 아주 느리고 좁은 걸음으로 길을 걸었고 아까보다 2~3배는 더 오랜 시간을 돌아가는 길에 소모했다. 그래도 한번 왔던 길이라 그런지 돌아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다. 여행 2주차에 접어드니 언제나 핸드폰에 의지해 길을 찾다 퇴화된 나의 뇌 기간 중 하나가 심폐소생술로 조금 살아난  듯했다. 그렇게 겨우 숙소 근처 뉘 하운에 도착했다. 뉘하운의 노랑, 빨강, 파랑 건물들과 그 아래 길게 뻗은 바닷물. 콩겐스 뉘토르광장과 연결을 위해 만든 인공운하인 뉘 하운 항구는 코펜하겐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크레파스로 색칠한 동네 같아.” 

어린 시절 형형색색 크레파스를 들고 이 색깔, 저 색깔 마음대로 줄을 긋는다. 알록달록한 건물 둘과 무지개 색의 꽃틀. 파란 하늘과 커다랗고 포근한 구름. 뉘 하운은 마치 어린아이의 스케치북 속에 그려진 컬러풀한 장소였다. 

어쩜 저렇게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둥글까? 숟가락으로 곱게 뜬 아이스크림 같다. 어린 시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며 어쩜 저렇게 구름을 동그랗게 잘 뭉쳐진 솜처럼 그려낼까 궁금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 구름도 저렇게  뭉개지지 않게 완벽한 형태로 그리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짜 유럽의 구름은 둥글둥글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처럼 구름이 바닥에 쏟아진 소금처럼 뿌려지기도 하지만 그건 비가 자주 오고 흐린 런던이라서 그런 것 같고, 그 외 대부분의 유럽의 도시들은 저런 구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글동글 잘 말린 구름과 반짝이는 바다를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는 뉘 하운 한켠의 벤치에 앉아 좀 전에 마트에서 사 온 샐러드박스를 꺼냈다.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둘러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가가 비싼 덴마크이기에 슈퍼에서 사 온 음식으로 식사를 때웠으나 샐러드는 때웠다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신선했고 풍부한 양의 견과류과 과일, 치즈가 들어있었다.


 나는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입에 물고 돌아와 다시 벤치에 앉아 뉘하운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반짝인다. 환하고 밝다. 행복하다.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무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이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나는  다시 한 번 두리번 두리번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큐 싸인이 떨어지기라도 한 듯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고 눈을 아치 모양으로 휘어가며 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모두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각자 대본은 같지만 각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느라 모두들 행복한 역할에 심취해 있다. 나는 마치 배우에게 더 웃으라고 말하는 쌀쌀맞은 감독이 된 듯한 기분에 나 역시 입술 끝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도 이 곳의 배우다. 나 역시 똑같은 대본의 디렉션을 읽고 있다. 

‘크게 웃으세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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