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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Nov 23. 2015

용감무쌍한 삐삐롱스타킹과 섹시한 스웨디쉬

사랑스런 유르고르덴 섬을 돌다 

Fotografiska의 아름다운 외관, 밖에서는 가벼운 공연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용감무쌍한 삐삐롱스타킹과 섹시한 스웨디쉬


어제 11시 클로징 시간까지 Fotografiska에 머물렀더니 호스텔에 돌아왔을 땐 이미 12시가 넘어 있었다. 씻고, 일기도 쓰고, 이것 저것 생각을 하며 침대 위를 뒤척거리다 보니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던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이토록 천근만근일 수가 없다.

“잠을 별로 못 잤나… 왜 이리 피곤하지.” 


Fotografiska에서 바라본 스톡홀름 전경

오늘은 유르고르덴 섬을 갈 예정이라 알람을 9시에 맞췄던 것 같은데 잠에서 깨고 보니 10시가 넘었다. 나는 헐레벌떡 머리를 감고 대충 손으로 머리를 빗질한 후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호스텔에서 유르고르덴 섬으로 가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호스텔이 센트럴 중앙과는 좀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을 2번 정도 갈아 탄 후 ‘외스테르 말름’ 역에 내려 트램을 타야 한다. 외스테르 말름 역에 내려 이 곳 지하철의 그래피티를 둘러본다. 여기엔 이집트 벽화를 패러디 한 듯한 유쾌한 그래피티와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즐겁다. 바로 옆 벽엔 오선지가 그려져 지나가는 시민들 한 명 한 명이 음표가 된 듯 흥겹다. 뉴욕의 경우 깨진 ‘유리창의 법칙’으로 도시의 모든 그래피티를 지웠는데 이 곳에선 도시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그래피티를 장려하는 게 흥미롭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니 저 멀리 푸른 바다와 보트들이 햇빛을 받은 하얀 자갈처럼 빛난다. 눈이 부시다. 오늘도 참 날이 맑다. 북유럽의 여름이 너무 짧다는 걸 알아서일까, 나 역시 이토록 찬란한 눈부심이 소중하고 고맙다. 나는 길 건너편 작은 트램에 몸을 싣는다. 이 트램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르고르덴 섬으로 가는 것 같다. 다들한 손엔 가이드 북을 한 손엔 지도를 들고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처럼 활자에 집중하고 있다. 


‘djurgarden’ 

버스 전광판에 유르고르덴이란 글자와 안내방송이 나온다. 역시나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정류장에 쏟아져 내린다. 유르고르덴 섬에는 바사호 박물관, 북방 민속 박물관, 유니 바켄, 스칸센, 아바 뮤지엄 등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어느 곳을 갈까요, 알아맞혀보세요. 등. 동. 댕. 동! 그래 1번은 바사호!”

사실 나는 막연하게 어린 시절 텔레비전 속 나의 친구이자 용감무쌍하고 모험심이 강한 말괄량이,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관련 전시가 있는 유니바켄외에는 가고 싶었던 곳이 없었다. 하지만 수 많은 가이드에서 바사호 박물관은 꼭 들리는 게 좋다는 글을 봤던 지라 나는 우선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사호 박물관 앞의 길고 긴 줄


“이게 줄인가요?”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줄에 나는 화들짝 놀라 앞에 서있는 노부부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그들은 껄껄 웃으며 어서 줄을 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금세 끼어들 것이라며 나의 팔을 잡아 당겼다. 다행스럽게도 줄은 예상보다 빨리 줄어들었고 나의 정수리가 뜨거운 태양에 노릇하게 구워지기 전 나는 에어컨이 시원한 박물관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와, 크다. 그런데 이게 단가?”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건 엄청난 규모의 전함 바사호였다. 이 세상 그 어느 배보다도 오래된 전함 바사호. 독일의 30년 종교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배는 1628년 첫 출항을 나섰으나 이내 스톡홀름 항구에서 불어온 돌풍을 만나 침몰했다. 아직도 정확히 침몰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한 비운의 전함 바사호. 박물관 내부는 이 배와 배 안에서 발견된 장식품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배의 제작 과정, 배 인양 과정 등을 설명한 사진, 다큐멘터리, 모형들로 가득 찼다. 솔직히 말해 다큐멘터리 외에는 이 배 자체는 나에게 큰 흥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엄청난 배의 규모와 섬세함에 감탄할 뿐, 오히려 나는 아침도 먹지 못해 꼬륵 거리는 주린 배를 채울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박물관 안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코펜하겐에서 만났던 건축인 K씨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밥 먹는 걸 즐긴다고 했다. 각 레스토랑마다 그 전시장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맛도 크게 나쁜 적이 없어 실패를 겪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아로새겨 박물관 레스토랑에 입성했다. 

그리곤 스웨덴 대표 음식인 미트볼을 주문했다. 

“왠 콤포트?” 


스웨덴에선 미트볼을 석류, 베리 등의 콤포트나 베리 잼을 곁들여 먹는다. 나로선 고기에 잼을 바른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맛이었다. 나는 주섬주섬 의심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초리로 미트볼을 응시하며 레스토랑 밖 파티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젊은 부부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와 옆자리에 앉아도 될지 양해를 구한다. 고개를 들어 레스토랑을 둘러보니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미트볼에 집중하느라 나는 이 자리가 하나 남은 빈 테이블이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다시 미트볼에 나이프를 가져다 댄다. 


스윽갈라지는 으갠 고깃덩이 사이로 미트볼 위를 감싸던 소스가 스며든다. 포크로 고깃 조각을 콕 집은 후 석류 콤포트를 살짝 발라 입 속으로 집어 넣는다. 석류 콤포트가 올라간 고깃 조각은 마치 시든 꽃 송이 아래 핀 열매 같다. 달콤한 콤포트와 담백 고소한 육즙이 뒤섞이며 처음 맛보는 새로운 맛이 입 안을 돈다. 미트 파이를 먹는 느낌이다. 육즙의 느끼한 끝 맛을 잡는 달콤함에 나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나는 다시금 포크와 나이프를  재정비한 후 쉴 새 없이 고기를 입 안에 집어 넣었다. 버터를 한 숟갈 가득 바른 빵과 샐러드를 입 안의 빈 공간이 메우듯 요리조리 집어넣는다. 


“아 진짜, 바사호 오길 잘 한 것 같아.”

주객이 전도된 행복이다. 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행복하기만 하면 된 것 아닌가. 나는 방긋 방긋 미소를 피운다. 매우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그토록 기대하던 유니 바켄으로 걸어갔다. 유니 바켄은 바사호의 바로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니 바켄은 기대에 비해 매우 조촐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숲 속의 낡은 오두막을 발견한 것처럼 두리번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주부터 유니 바켄 안의 미니 기차는 운행하지 않아요. 보수 중이거든요. 괜찮으시겠어요?”

미니 기차. 사실 유니 바켄은 아이들을 위한 박물관이기 때문에 박물관 내부에는 아이들이 탈 수 있는 귀여운 미니 기차를 운행한다고 들었다. 직원의 말에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유니 바켄 내부는 예상한 대로 아이들로 가득했다. 거기다 규모가 매우 작아 흡사 놀이방이나 키즈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 기구들을 꼼꼼히 살펴본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토베 얀손 등 어린이 동화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작가들과 스웨덴에서 제정한 어린이 문학상인 린드그렌 문학상 수상 작품들로 꾸며진 놀이 기구들 사이로 아이들의 얼굴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놀이기구 뒤로 작지만 소소하게 꾸며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연혁을 소개한 작은 전시회가 열려 있다. 놀이기구들이 있는 방과는 달리 아이들 한 명 보이지 않는 이 곳에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와 삐삐의 이미지를 둘러 보았다. 


일곱 살짜리 어린 딸 카린이 침대에 누워 무작정 외친 ‘삐삐 롱스타킹’이란 이상한 이름을 가지고 린드그렌은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용감한 사랑스러운 소녀 삐삐 롱스타킹의 모험담을 만들었다. 삐삐의 이야기는 린드그렌의 딸 카린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세상 수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세상에서 가장 용감무쌍한 소녀로 성장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을, 그리고 삐삐를 보고 자란 어른들이 느낀 행복과 즐거움이 어찌나 컸던지 삐삐 롱스타킹의 필사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다. 


“안녕! 삐삐!”

나는 빨강머리 삐삐에게 손을 흔든다. 어느새 내 옆에는 아장아장 발걸음을 걷는 노란 원피스를 차려 입은 금발의 꼬마가 서 있다. 꼬마 역시 삐삐에게 손을 흔든다. 꼬마 뒤로 엄마가 뛰어오더니 그녀를 들쳐 안고는 “어머, 삐삐 롱스타킹이네! 삐삐 안녕!” 하며 꼬마와 함께 손을 흔든다. 

꼬마도, 꼬마의 엄마도 삐삐와 함께 자란다. 삐삐의 환상적이고도 괴상한 모험을 세대를 이어 추억한다. 나는 봉투 가득 삐삐 관련 기념품을 사 들고 유니 바켄을 빠져 나왔다. 이제 좀 더 힘을 내야겠다. 그래야 삐삐 롱스타킹 못지않은 모험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유니 바켄을 나와 이번엔 어디를 갈까 고민한다. 지도를 무심히 바라보다 문득 어제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가져온 어느 독특한 전시회 브로셔가 떠올랐다. 분명 유르고르덴 섬에 있는 어느 낯선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였는데. 나는 가방을 뒤적거리다 가이드 북 사이에 끼워둔 브로셔를 발견했다. 



“스프린트 뮤지엄!” 

일전에 살펴보았던 북유럽 관련 가이드 북에도 나와있지 않는 낯선 이름의 박물관이라 그런지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프린트 박물관은 작은 규모의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이곳은 술과 와인 관련된 전시를 하는 곳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마치 일반적인 술의 역사를 알려주는 흔한 박물관 같지만 이 곳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 독특함에 나는 크게 환호했다. 



“내 선택이 절대 틀리지 않았어!”

지직지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7~80년대 펑키뮤직이 흘러나오는 1번 전시실에는 앤디 워홀의 앱솔루트 보드카 콜라보레이션 팝아트를 필두로 수 없이 많은 유명한 작가들의 콜라보레이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뒤에는 행오버를 체험할 수 있는 상자, 여러 가지 술의 향을 맡아 볼 수 있는 자판기 등 독특한 전시물들이 눈에 띄었다. 술에 관한 전시실 외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SwedishSin’이란 성인만이 입장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웨디쉬 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금은 당황스럽게 커다란 화면에는 나체의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스톡홀름을 누비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고 그 옆에는 스웨덴의 섹스 역사와 역사적으로 기록할만한 스웨덴 영화 속 베드신들이 작은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다양한 견해의 칼럼과 뉴스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 스웨디쉬 씬. 섹스와 포르노, 게이와 레즈비언, 부부 스와핑,10대 성매매가 무척이나 빨리 개방된 스웨덴은 많은 남성들의 꿈같은 나라였다고 한다. 한때, 혹은 지금도, 수많은 미국 남성들의 꿈의 여행지로 꼽힌다는 스웨덴. 그런 개방적임은 사람들의 꿈의 장소가 됨과 동시에 무력감에서 오는 높은 자살률, 암암리 성행하는 미성년자 성매매, 성범죄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

스프리트 박물관은 그저 야하고 흥미로운 전시를 넘어 이러한 스웨덴의 사회적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은 박물관은 전시기획으로 몇 번이나 큰 상을 받았다고 한다. 흥미와 사회적 이슈를 동시에 사로잡은 이색적이고도 멋진 박물관을 발견함에 나는 무척이나 뿌듯해졌다.   


타박 타박 길을 걸어 북방 민속 박물관을 슬쩍 둘러보고 아바 박물관 앞을 서성여본다. 박물관 폐관 시간이 다가와 스톡홀름 카드로 무료입장이 가능한 북방 민속 박물관은 흥미가 있는 북유럽 패턴, 접시 관련 전시만 살짝 들여다보고 아바 박물관 앞에선 얼굴만 살짝 기웃 거리 다발 걸음을 돌린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야외 박물관이자 동물원, 수족관이 있는 스칸센이 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스칸센 안에서 가벼운 산책만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에 유르고르덴 섬을 둘러보는 건 나에겐 큰 욕심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백야로 인해 해가 밤 11시는 되어야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북유럽에선 시간 개념이 없다. 한참을 걷고 돌아다니다 너무 피곤해서 하늘을 보면 아직 대낮처럼 느껴져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직 낮인 줄 알고 열심히 정신을 놓고 돌아다니다 시계를 보면 이미 밤 9~10시일 때도 있었다. 오늘은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이 시간에 나의 하루 일정을  마무리해야겠다. 내일은 1박 2일로 스웨덴의 아름다운 섬 ‘고틀란드’로 모험을 떠나야 하니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

1907년 스웨덴 남부 스몰란드 지방 빔메르뷔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픈 딸 카린이 지어낸 ‘삐삐 롱스타킹’이란 이름을 사용해 삐삐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삐삐 롱스타킹은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일약 인기 동화작가가 된 린드그렌은 창작욕에 불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꼬마 닐스 칼손》으로 닐스 호르겔 손상,《라스무스와 나그네》로 국제 안데르센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은 《미오, 나 의미오》,《명탐정 카트레군의 모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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