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Nov 26. 2015

비행소녀는 성장한다. 마녀 키키의 고향 ‘고틀란드’

스웨덴 고틀란드 섬의 신기한 '중세 축제'

고틀란드에서 한커어엇!


비행소녀는 성장한다. 키키의 고향 ‘고틀란드’


스웨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스웨덴 사람들의 신혼여행 장소로 유명한 고틀란드는 유네스코에도 등록된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이다. 그리고 이 곳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추측하건대 키키가 처음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동네와 키키가 배달을 갔던 시내에서 떨어진 작은 섬과 집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키키의 배경이자 매년 8월 초에는 어김없이 개최되는 ‘중세 축제(Medieval Week)’을 구경하기 위해 고틀란드의 비스뷔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스웨덴 여행을  계획했을 때도 고틀란드는 무조건 가야만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부푼 기대로 온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넷젯이란 스웨덴의 저가 항공을 타고 비스뷔로 출발한다. 비행기가 어찌나 작은지 경비행기 같다. 거기다 이른 아침시간 비행기라서 그런지 승객은 나를 포함해 10명도 되지 않았다. 초 스피드로 체크인을 하고 들어 온 것과 같이 재빠르게 공항을 빠져 나와 고틀란드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스톡홀름보다 더 뜨거운 공기를 내뿜는 태양과 더 짙고 푸른 바다의 향을 품은 바람. 성벽에서부터 날려오는 오래된 흙의 냄새와 촉감, 초록빛 풀 잎사귀의 청량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공항버스를 타고 비스뷔 성벽에 입성했다. 성벽 근처에 자리 잡은 호텔에 재빠른 다람쥐처럼 빠르게 짐을 맡기고 비스뷔의 오래된 옛길을 걸어보았다. 모서리가 닳은 네모 같은 돌들이 알알이 박힌 바닥과 성벽 사이로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올록볼록 솟아있다. 나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 안으로 걸어갔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어느 나라에서도 느낀 적 없는 낯섦이 몰려온다. 옛 드레스와 헤어 장식을 한 여자들과 칼을 들고 기사의 복장을 한 남자들, 하녀 복장을 한 남녀와 음유시인 같은 남자들, 요정 같기도 하고 난쟁이 같기도 한 옛 복장의 아이들. 대장간이 있고 장신구를 팔고 고기를 썰고 손수 만든 잼을 판다. 한 켠엔 칼 싸움을 하고 있고 한 켠엔 설치된 작은 무대 위에서 만담 같은 쇼가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웃음을 짓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를 한다. 아! ‘중세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일 년에 한번 일주일 정도 진행되는 중세 축제(Medieval week)를 위해 수많은 스웨덴 사람들은 손수 중세 복장을 준비 해 코스튬을 갖춘 후 이 축제에 참여한다고 한다. 매년 이 날만을 기다리며 옷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도 있고 특별한 상점에서, 혹은 이 곳 비스뷔에서 코스튬을 구입하여 옷을 차려 입고 이 행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나처럼 꼭 중세 복장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들었다. 하지만 막상이 곳에 오니 거의 90프로의 사람들은 중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Yourhighness’란 말로 인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중세의 수많은 공주들, 왕자들이 이 곳에 넘쳐나니 말이다. 나는 신기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스뷔 시내를 헤집듯 구석 구석을 돌아본다.    

바이킹 시대부터 상업도시로 발달한 비스뷔는 12~15세기 한자 동맹 시대 유럽을 잇는 중요한 무역항 중 한 곳이었다. 비스뷔는 그 어느 곳 보다 더 중세 한자 시대,  그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다.



비스뷔의 길을 걷고 있으면 발바닥에서부터 옛 시절의 영광이 느껴지는 것 같다. 활발하게 배와 항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흥이 넘치는 아낙네들, 고독한 눈빛과 야망으로 가득 찬 바다의 사내들의 모습이 발끝을 타고 올라 머리 속에 영화처럼 펼쳐진다. 나는 마치  오래전 휘발된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 가득 환희에 사로잡혀 동네를 뛰어다녔다. 비스뷔의 땅이 지닌 오래된 기억의 여진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중세 축제를 더욱 실제 그 시대처럼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환히 웃음 지으며 동네를 뛰어다니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슴고기 샌드위치를 구입해 입에 넣는다. 북유럽에선 사슴, 엘크, 곰, 고래 같은 우리나라에선 잘 먹지 않고 찾기 힘든 동물의 고기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샌드위치를 구입할 때도 중세 복장의 여자는 “곰고기? 사슴고기? 어떤 고기를 넣어 줄까?”라고 물었었다. 처음 먹는 사슴의 질긴 식감에 나는 거친 풀을 씹는 소처럼 온 얼굴의 근육을 써서 질겅질겅 고기를 씹는다. 조금의 누린내가 살짝 역겹게 목을 타고 입 밖으로 올라오긴 했으나 이내 나의 혀와 위는 적응을 했던지 고기를 꿀떡꿀떡 배속으로 맛있게 삼킨다. 잠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춤, 활 쏘기 시합을 감상하다 다시 성벽 입구 근처로 걸어간다. 성벽 입구엔 나와 같은 동양인 한 명이 서 있다. 유럽 여행 카페에서 알게 된 ‘은 언니’였다.



그녀는 여름 휴가지로 스웨덴을 택했고 고틀란드에 대한 자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가기가 부담스러워 카페에서 동행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시기에 비스뷔를 가는 또 다른 한국사람이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그녀에게 연락했고 우리는 마침내 비스뷔의 오래된 성곽 입구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비스뷔의 해변을 걸으며 비스뷔의 여름을 만끽했다. 뜨겁긴 했지만 광활한 바다를 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온다. 철썩이며 다가오는 파도가 우리를 환호하는 박수소리 같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마트에서 가볍게 장을 보고 동네 한 바퀴를 다시 돌아본 후 비스뷔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걸어갔다. 언덕에 보자기 하나를 깔고 우리는 널 부러진다. 개구리처럼 몸을 웅크렸다 사방으로 펼치며 풀밭의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오늘 하루 참 길다. 그쵸?”

나는 은 언니를 바라보며 낄낄 장난스레 웃었다. 어릴 때는 하루하루가 참 길게 느껴져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길 바랬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세상 모든 것들이 신기했고 새로웠으며 ‘배움’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막상 20살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니 모든 나날이 지루한 반복으로 가득 찼고 지루한데도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아이러니 속에 나는 갇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반복에 익숙해져 갔고 어떠한 면에선 능숙해지기까지 해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흘려 보내고만 있었다.


“언니, 참 이상하죠?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니 꿈 많고 천방지축 어리던 사람들 모두가 똑같아졌으니 말이에요.”      

“얼마 전에 어떤 50대 일본인 아저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자기는 인생을 길게, 오래 살기 위해 여행을 한데.”

“오래 살기 위해 여행을 한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항상 호기심에 가득 찼고 매일, 매시간, 매초가 새로워 경탄으로 가득 찼었다. 하나하나를 피부로, 맛으로, 눈으로, 귀로 느끼다 보니 하루가 길  수밖에 없다. 하루 24시간, 매 순간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나이가 드니 시간, 하루는 그냥 반복적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 되었다. 노인들은 말한다.

“참 세월 빠르네, 네가 벌써 그만큼 컸니?”

아이는 어른이 되기까지 경이로움과 새로움을 먹고 자라고 나이가 들어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제 기억을 파 먹다 보니 빠르게 늙어가는 것이 아닐 까란 생각이 든다.


“진짜, 여행을 오면 하루가 참 길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새로운 것도 보고, 먹고. 하루에 참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제 머리 속엔 회사 집, 잠 말곤 어제도 그제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참 사람이란 웃겨요.”

“진짜 나이 먹는다는 생각이 들면 여행을 가야 하나 봐.”

“전엔 일기를 쓰려고 해도 오늘 하루에 대해 쓸 일이 없었어요. 어제랑 비슷하니까. 그런데 이젠 노트 한 페이지에 다 적지 못할 만큼 다양하고 긴 이야기가 매일매일 생겨요.”

아, 이 얼마나 멋진 가? 여행지에서 우리의 하루는 길어지고 우리는 인생을 길게 살게 된다.

“앞으로 내 입에서 벌써 시간이,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란 말이 입 밖에 나오면 당장 여행을 떠날래요.”

“나도 그러고 싶어.”


29살, 30살을 앞둔 나는 인생을 길게 살기 위해,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내 29살의 여름은 내 인생의 그 어떤 여름 날 보다 길고 강렬하다.

해의 모양이 하늘의 무게에 눌린 듯 찌그러지며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댕, 댕, 종소리가 울린다. 벌써 저녁 9시다.

“백야는 백야구나. 저녁 9시는 돼야 노을이 보이기 시작하니.”    


은 언니는 기지개를 펴며 남은 맥주 한 모금을 홀짝였다. 나도 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으며 비스뷔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곤 아직 빛이 조금 남아 하늘이 보랏빛으로 빛날 때가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시내 중앙으로 걸어갔다. 중세 축제의 밤은 가로등 하나 없는 공터에 피어난 횃불의 춤으로 눈을 뜬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정신없이 어둠 속에서 추는 춤. 횃불을 켜도 칠 흙같이 검어진 하늘 아래 인공 불빛이 없는 이 곳은 살짝 기괴한 느낌마저 든다. 흔들리는 횃불에 비친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모두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마치 어떠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 모두들 집중해서 웃고, 집중해서 춤을 추고, 집중해서 노래를 부른다.


“밤이 되니 더 중세 같아요. 어두컴컴하고 횃불만 있으니 조금 어색하던 코스튬이 다 진짜 같아요. 옛날엔 진짜 이렇게 먹물 같은 어둠 속에서 밤을 보냈겠죠? 이렇게 어두운 밤은 참 오랜만이네요. 도시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어둠.”

우리는 마치 역사 속을 여행하는 이방인처럼 물끄러미 그들의 춤을 바라보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비스뷔에서 시간여행자로서의 하루는 매우 길고 피곤했다. 나는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또다시 은 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다시 시내를 둘러보고 사람들을 구경하곤 고틀란드 도서관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곤 다시 또 성벽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 재미가 있어 한없이 걸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은 공터에서 왈츠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모두들 드레스를 차려 입고 한껏 멋을 냈던 지라 나와 언니는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옆에 살짝 비껴 서 왈츠를 따라 췄다.  쿵 짝짝  쿵 짝짝, 파트너도 없이 우리는 가상의 인물을 품에 안고 춤을 춘다.



서로의 모습이 너무 우스워 우리는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친다. 벌써 여기에 일주일은 머문 느낌이다. 지루함이 아니라 익숙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이 중세 시대의 시간여행자 혹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 시대, 이 섬에 사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길게 흘러도 비행기가 떠날 시간은 좀처럼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하루의 끝에는 공항 게이트가 입을 벌리고 나를 기다린다.



 나와 은 언니는 아쉬움을 뒤로 한 체 공항에서 이별했다. 언니는 이제 노르웨이를 잠시 거쳐 한국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스톡홀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아쉬움에 끝없이 손을 흔들며 각자의 비행기로 몸을 옮겼다. 비행기가 떠오르고 눈 아래 비스뷔가, 고틀란드가 보인다. 빗자루를 타고 나는 키키처럼, 진정한 마녀가 되기 위해 고틀란드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날아간 키키처럼, 나도 나란 사람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생각하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비행은 소녀들을 성장하게 한다. 더 나은 어른이 아닌, 더 나은 사람으로, 비행소녀들은 그렇게 하늘을 날며 성장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용감무쌍한 삐삐롱스타킹과 섹시한 스웨디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