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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Dec 20. 2015

달콤하고 게으른 헬싱키의 여름날

수오멘리나 섬과 에스플라나디 파크

어제 페스티벌의 여파로 나는 꽤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눈을 뜨고 보니 이미 점심시간, 방에 딸린 부엌에서 유키코는 치직거리는팬프라이 소리를 내며 브런치를 만들고 있었다.

“림짱, 잘 잤어?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

“아직도 온몸이 쑤셔. 오늘은 어딜 갈지 모르겠네. 너무 노곤하다.”

“그럼 수오멘리나 섬에 천천히 산책이나 다녀와.”


수오멘리나 요새. 헬싱키에 있는 동안 꼭 가보아야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언제 갈지 정하질 않았던 곳. 나는 캥거루처럼 침대에서 튀어 나가 재빠르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그리곤 복숭아 하나를 입에 물고 문을 나선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듯 유키코는 부엌 언저리까지 나를 배웅한다.

“밥도 안 먹고 나가? 카우파토리에서 먹을 것 좀 사 들고 가!”


유키코의 말에 나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나왔다. 수오멘리나에 가려면 우선 노천  재래시장인 카우파토리로 가 마켓 광장 앞 항구에서 배를 타야만 한다. 트램을 타고 카우파토리에 도착해 수오멘리나로 가는 배 시간을 확인하니 약 30분 후, 1시 20분 배가 가장 빠른 배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카우파토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각 판매대에 놓여있는 신선한 형형색색의 과일들과 야채들의 신선도를 체크하고 불 판에서 구워지는 생선요리들을 구경했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탐색하듯 매우 신중히 정성스레 각 판매대를 관찰했다. 북유럽의 물가는 엄청나게 비싸지만 우리나라와 견주었을 때 괜찮은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이 있다. 바로 ‘베리’. 한국에서 꽤 비싼 편에 속하는 베리가 여기에선 꽤나 싸고 흔한 과일이다. 나는 다른 집에 비해 1유로 정도 가격이 싼 무뚝뚝한 아저씨의 판매대에서 싱싱한 블루베리 한 바구니를 샀고, 그 옆 예쁜 언니가 구워주는 시나몬 롤과 커피 한 잔을 함께 구입했다. 블루베리 한, 두 알을 주섬주섬 입 속에 집어넣으며 파르라니 투명한 구름들을 지켜보며 그렇게 배를 기다렸다.



배가 출항을 알리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바다를 가른다. 수오멘리나로 가는 배 안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오래전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수오멘리나 요새는 역사적 가치는 물론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오래전부터 핀란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풍 장소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모두들 카우 파토리에서 피크닉 준비를 한 듯 두툼한 갈색  종이봉투를 하나씩 안고 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봉투를 꼭 쥐고선 수오멘리나의 아름다움을  상상해 본다. 살짝 더운 날씨임에도 얼굴 위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닷바람 덕분에 기분이 상쾌하다.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쾌청함에 미소를 짓는 동안 우리의 배는 조용하고 나른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수오멘리나에 다다랐다.



북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심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명확하진 않지만 흐릿하게나마 각 나라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었다. 코펜하겐은 나의 선입견에 오렌지 빛 찬란하고 아름다운 석양을 그려 넣어 좀 더 화려한 이미지로 변모했다. 그에 비해 스톡홀름은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일까? 볼 것이 많아 북유럽 관광객들 사이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다는 이 곳이 나에게는 너무 바쁘게 느껴졌다. 마치 보랏빛 저문 해가 긴 여운을 남기듯 왠지 모를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런데 헬싱키는 정말, 내가 오랫동안 상상했던 그 이미지 그대로였다. 흰색과 하늘색이 만나 푸른 하늘과 구름처럼 우아하게 나부끼는 핀란드의 국기. 숲이 가득하고 평화롭고 조용한 이 곳 사람들의 삶.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반짝이는 이가 보이게 지어 보이는 미소가 더욱 특별하고 아름다운 따뜻한 사람들.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도 개구져 보이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들. 통통하고 커다란 갈매기가 가득한 항구, 하늘엔 하얀 갈매기가 둥둥 떠있고 바다엔 하얀 배들이 부유하는 곳.



헬싱키는 참 살고 싶고 좀 더 오래 여유롭게 머물고 싶은 곳이다. 그리고 이러 한 핀란드 사람들이 소풍을 떠나는 장소인 수오멘리나는 한적한 아름다움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붉은 열매를 가득 품은 나무가 옅은 바람에 흩날리고, 그 앞엔 그  붉은빛을 머금은 파도가 잔잔히 밀려온다.


나는 배에서 내린 후 지도도 없이 사람들을 따라 수오멘리나섬을 타박타박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은 관광을 하기 보단 여기저기 돗자리를 펴고  주저앉아 준비해온 간식을 꺼내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양산을 펴고 그 아래 아이를 재우는 엄마, 동그랗게 둘러 누어 하늘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하는 소년 소녀들,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아이들과 달리기를 하는 아빠. 나는 근처 풀밭에  주저앉아 아까 사 온 시나몬 롤을 꺼내 한입 베어 문다. 조금 식었지만 안쪽에 온기를 간직한 빵을 한입 베어 물자 나는 훗날 정말로 이 곳을 그리워할 것이  틀림없다는 예감이 든다. 지금 막 결혼식장에서 누군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됨을 선언한 신부의 어쩔 줄 모르는 기쁨과 행복처럼,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묘한 기쁨 속에 벌써부터 이 곳의 여유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수오멘리나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다 보니 하늘이 조금씩 흐려진다. 나는 다시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다. 그리곤 그 길로 곧장 직진하여 에스플라나디 파크로 갔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핀란드 푸드 블로거라는 여대생 한 명을 팔로우 했었다. 그리곤 그녀의 사진에 “헬싱키에서 꼭 봐야 할 것이나, 먹을 것이 있나요?”라고 댓글을 달았고 그녀는 친히 정성스레 정리한 헬싱키의 맛집 리스트와 핫 플레이스 리스트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때 그녀는 여름에 꼭 가면 좋을 공연이 3개를 추천했고, 첫 번째는 내가 어제 다녀온 Flow Festival, 나머지는 오직 여름, 8월 초에만 만날 수 있는 파크 콘서트였다. 헬싱키 내에는 수많은 공원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쉼터 ‘에스플라나디 공원’이고 하나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크고 아름다운 ‘시벨리우스 공원’이다.

이 두 공원에선 여름날 일주일 정도 파크 콘서트를 진행하며 마침 내가 헬싱키에 머물고 있는 동안 두 곳 모두 공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촐랑촐랑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한 에스플라나디 파크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공원 중앙의 스테이지 앞에 모여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Etno-espa Festival’ 란 이름으로 피니쉬 포크 뮤직과 시 낭송대회를 진행하는 이 행사의  첫날 이었고, 내가 스테이지 앞에 도착했을 땐 창작 시 공모에서 수상한 사람들의 시상식과 페스티벌의 서막을 알리는 축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포크 뮤직 밴드의 신나는 공연이 이어졌다.


에스플라나디 파크에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시인인 루네베리, 에이노 레이노, 작가 토펠리우스의 동상 등 많은 문인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문인들의 영혼이 숨 쉬는 공원에서 펼쳐지는 시 낭송대회와 포크 뮤직 페스티벌이라니,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핀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이 곳을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마음으로부터 깊이 느껴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핀란드 어 노래에 맞춰 손뼉을 친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가 무대를 향해 환호를 보내며 어깨를 들썩인다.


에스플라나디 파크 콘서트


짧지만 강렬한 북유럽의 여름, 사람들은 짧은 여름을 슬퍼하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7월 중순까지 춥고 8월 중순부턴 다시 추워지는 이 짧디 짧은 여름을 그들은 반짝이는 여름날의 반딧불이처럼 아름답고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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