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난 뭉크와 최고의 커피 Tim wendelboe
뭉크가 보고 싶었다.
항상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 살았던 비운의 천재.
오슬로에서 꼭 하고 싶은 걸 떠올리면 뭉크를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지도 한 장을 들고 길을 돌고 돌아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뭉크 미술관이 따로 있지만, 우선 뭉크의 ‘절규’가 있는, 그리고 중앙역에서 가까운 국립미술관을 먼저 왔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뭉크의 절규를 비롯하여 뭉크의 대표작인 마돈나, 아픈 아이, 사춘기, 생의 춤 등이 있다. 국립 미술관 안에 들어가니 노르웨이의 유명 작가들은 물론 유럽 전반의 유명 작품들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었다. 수많은 노르웨이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여름밤’이란 이름의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여름밤의 이미지는 모두 새벽 혹은 이른 아침의 흐릿한 빛과 축축한 물기가 배어 있다.
새삼 오래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했던 독일인 소년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요.”
옛날에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어린 소년이 아닌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세상은 모두 다 이렇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북유럽의 여름 ‘백야’만을 경험했을 것이니 여름밤이 하얀 커튼처럼 창백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만약 내 인생에 여름밤이 언제나 상앗빛으로 여리고 차갑게 빛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나는 한동안 여름밤이란 이름의 작품들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수많은 유명 작품들이 있어도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건 단연 ‘뭉크’의 작품들이 있는 전시관이었다. 엄청난 인기를 증명하듯 이 전시관만 촬영이 금지되어있고, 수많은 감시관들이 서서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했다. 오래전 미술책에서만 봤던 뭉크의 작품을 마주하니,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기묘한 아련함과 슬픔이 느껴진다.
시골 전원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뭉크는 어린 시절 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가장 친하고 사랑했던 누나를 잃었다. 이후 뭉크는 극도로 불안한 정신상태를 보였다.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여동생의 정신병을 지켜보다 심각할 정도로 종교에 의존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 역시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뭉크는 자신 역시 태어날 때부터 정신병이 유전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곤 했다. 이때부터 뭉크에게서 여성이란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국립미술관에는 그가 사랑했으나 자신을 떠난 연인, 다그니 유을을 모델로 여성과 삶, 죽음을 연결한 작품 ‘마돈나’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대표작품 ‘절규’ 가 마돈나의 옆에 걸려 있다.
나는 두 명의 친구와 해 질 녘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화했고 나는 말로 표현 못 할 피곤함에 난간에 잠시 기대어 섰다. 핏빛과 불의 혓바닥이 검푸른 피오르드를 뒤덮었다. 친구들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서 뒤떨어져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한 절규를 들었다.
뭉크는 이 그림이 어떠한 계기로 그려졌는지 위와 같이 설명했다. 핏빛과 불의 혓바닥이 도시를 뒤덮고 몰려오는 두려움과 끔찍한 절규의 소리. 뭉크는 그 그림을 그린 후 자신은 몇 년 동안 거의 미쳐있었다고 말하며 그 당시 자신은 한계로 뻗어 가고 있었으며 자신의 핏속에서 자연은 절규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그는 사랑에 실패한 상태였고 이날의 경험 이후 그는 사랑을 다시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림 속, 그 당시 그의 귓속에 들려온 절규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대한 스스로의 절규가 메아리쳐 다시 자신의 귀속으로 들어온 건 아니겠느냔 생각이 든다. 아아 불쌍한 뭉크. 수많은 관람객이 절규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한다. 우리 모두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외로움과 두려움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으니 말이다.
국립미술관을 나와 아까 장을 봐 두었던 요구르트와 바나나를 먹었다. 새벽부터 나와 비행기를 탔고 점심이 될 때까지 돌아다녔더니 요구르트와 바나나로는 전혀 배가 차지 않는다. 결국, 값비싸고 양이 작은 샌드위치 하나를 사 입안에 집어넣는다. 여행에서 먹는 건 잘 챙겨 먹겠다던 나의 다짐이 여기선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같은 북유럽이지만 가장 오래 머물러야 하고, 가장 이동이 많아 교통비가 부담되어서인지 이 전 나라와는 또 다른 높은 물가를 체감한다. 나는 다시 중앙역으로 와 지도를 펼친다. 그리곤 뭉크 미술관이 어디에 있는지 거리를 가늠해 본다.
“2~30분은 걸어야겠구먼.”
새벽부터 움직인 덕에 몸이 무거워 버스를 타 볼까 잠시 고민도 해 보았지만, 버스를 한번 탑승하는데 8,000원이 넘기 때문에 그냥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중앙역 뒤쪽으로 돌아 위로 쭈욱 걸어 올라간다. 오슬로 중앙역 뒤쪽은 아까 국립미술관으로 가는 길과는 또 분위기가 다르다. 사뭇 이민자 촌으로 보이는 이 길은 음산하기도 하고 길가에 쓰레기가 잔뜩 널브러져 있어 나를 크게 당황시켰다. 코펜하겐, 스톡홀름, 헬싱키 그 어느 곳에서도 마주치지 못했던 빈부격차가 이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두 다리는 더욱 속력을 내서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25분 정도 걸어가니 눈앞에는 신비로운 뭉크 미술관이 보인다. 아까 그토록 흐렸던 하늘마저 개여 매우 환하게 밝아졌다. 참으로 희한한 날이다.
‘두려움의 천사들, 깊은 슬픔,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내 옆에 존재했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무서운 이야기에 심취했던 뭉크의 어린 시절은 그를 더욱 악몽과 두려움의 세계에 빠져들도록 만들어 버렸다. 뭉크미술관은 그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에 관해 작품을 차례로 전시해 두었다. 죽음과 광기는 자신에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유전적인 것이며 자신은 이것이 두렵다고 말하며 극도의 피해의식에 시달려야만 했던 처량하고 아슬아슬했던 그의 삶.
뭉크 미술관은 깔끔한 외관과 조금 어두운 조명, 차가운 컬러의 벽으로 구성되어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무척이나 마음이 차분 해 짐을 느꼈다. 또한, 국립미술관에 비해 덜 북적여 좀 더 여유롭게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만나는 뭉크는 외로움과 고독함의 시너지를 증폭시켜 관람객의 마음을 더욱 강렬히 뒤흔드는 것 같다. 여름날에도 스산한 노르웨이의 공기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뭉크의 황량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듯하다. 나는 한층 무거워진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왔다. 뭉크 미술관을 보고 나니 갑자기 너무나도 피곤해졌다. 이제 저녁 6시가 다 되었기도 했고 여행 중 거의 처음으로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오늘 밤 타야 할 야간열차가 두려워진다. 분명 땅 위를 걷고 있는데 5센티미터 정도 공중에 붕 떠올라 있는 기분이 드는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카페인을 좀 마셔야겠다. 엄청나게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참 좋을 텐데.”
일전에 오슬로 커피에 대해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오슬로에 정말 엄청난 바리스타가 있고 그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는 글을 읽었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다시 뭉크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노트에 그 카페의 이름을 써 두었던 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Tim wendelboe. 여기서 얼마나 멀지?”
나는 구글맵을 열어 거리를 확인한다. 미술관에서 카페까지는 약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지금 피로가 쌓일 만큼 쌓였고, 여기 미술관까지 30분을 걸어왔다. 카페에서 역까지 다시 돌아가려면 약 40분을 걸어야 한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걸어서 그곳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일단 무작정 지도를 꺼내 형광펜으로 그곳의 위치를 표시한 후 지도를 따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발은 무겁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엄마의 허락을 받고 놀러 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렌다. 낮과 비교하면 한층 깨끗해진 하늘, 회색 구름을 끌어내고 자신의 쇼타임에 맞춰 춤추는 하얀 구름이 나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한다. 거기에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함께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청량하리만치 깨끗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길가에 작은 공터마다 예쁘게 다듬은 작은 정원이 있고, 아이들이 생기발랄한 빛을 내며 뛰어논다. 나는 잠시 시간 가는 걸 잊은 체 이 편안한 분위기에 취해 피로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오늘의 커피가 있나요? 혹은 추천을 좀 해주세요!”
Tim wendelboe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리스타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조금 놀란 듯한 바리스타가 이내 웃음을 머금으며 오늘은 케냐와 게이샤가 좋다고 추천을 해 주었다.
나는 케냐를 주문하고 카페 밖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유명세에 비해 매우 작은 카페 밖의 조그만 테이블에는 유모차 속 우는 아이를 달래는 아빠와 사이좋은 꼬마 남매, 아래로 도망치는 아기를 지켜보며 뒤뚱뒤뚱 춤을 추며 걷는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장난감 상자를 들고 있는 190센티는 넘어 보이는 장신의 아빠가 껄껄 키만큼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젊은 부부와 아이들로 가득한 카페. 하지만 시끄럽거나 요란스럽기보다는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그런 사랑스러움이 가득하다.
나는 커피와 함께 건네받은 스파클링 워터로 입을 헹구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그리곤 아까보다 한층 데워진 공기에 몸을 풀고 다시금 공익광고를 보는 듯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본다. 방금 막 불행한 가족사와 사람들의 배신으로 우울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뭉크의 작품들을 보고 와서인지, 왠지 이 광경이 강렬한 따뜻함으로 다가와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참 따뜻하다.”
그새 하늘이 다시금 조금씩 흐려져 간다. 하늘의 구름에 회색 꽃물이 들었다.
노르웨이 유명 건축 사무소 ‘스노헤타’에서 제작한 오슬로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보곤 꼭대기에 앉아해질 녘의 하늘과 바다,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언제부턴가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다. 한참을 걷고 걸어도 분명히 익숙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속의 길인데, 내 안의 미도리는 20살의 손을 놓아버린 순간 내 속에서 끝없는 길 찾기를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렸다. 19살 나이가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던 나오코는 죽어버렸지만, 19살에 죽지 못한 내 안의 미도리는 나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우두커니 20살의 환영을 되뇌며 뒤만 돌아보고 멍하니 서 있거나 어지럽게 달리거나 눈을 수없이 깜빡거리며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헤맸으나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정체해버렸다. 어려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 나이가 들어가고, 그에 비해 마음이, 정신이, 영혼이 나이를 먹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정체. 나는 어느 순간 정체되어버린 느낌이다. 그 방황의 한 가운데, 나는 오슬로의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또 내일 떠나야 할 길을 찾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보랏빛 하늘 아래 타오르는 마른 갈대밭처럼 재빠르게 불빛들이 피어나고 번진다. 이 여행이 끝날 땐 내 마음에도 길을 비추는 불빛이 피어날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피어나지 못한들 어떠하리, 길을 잃은 들 어떠하리. 영원히 마른 갈대가 된 듯 어떠하리. 나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 다시금 마음의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