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여행의 마지막, 노르웨이에 도착하다.
마치 오래 사랑했던,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이젠 과거 형이 되어버린 헤어진 연인과 길에서 우연히 조우하듯, 약간의 어색함과 아련함, 그리고 가슴 깊이 차오르는 반가움이 교차한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는 언제나 나를 이토록 떨리게 한다. 내가 유럽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이유는 되고 싶고, 하고 싶고, 닮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존경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인 것과 일맥상통한다고나 할까? 취미가 같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목표의식과도 연결된다.
유럽의 수많은 작가는 나에게 글을 쓰고 싶다는 참기 힘든 열망을 온몸에 심어주었다. 음악, 미술, 패션, 그리고 유럽 특유의 오래된 분위기 등은 내가 언제나 이상적으로 여기던 것들이 총망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니 내가 어찌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듯 내가 이곳에 살지 않기에 이곳이 나의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니 비행기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아도 큰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나는 무뎌졌다. 발뒤꿈치에 가득 쌓인 굳은살 만큼 내 얇고 가볍던 마음 위에 굳은살이 박힌 모양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큰 변화라기보단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을 몸에 표한 것 같다. 어느새 여행을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었고 나는 새로운 나라 ‘노르웨이’의 오슬로에 도착했다.
오슬로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아침, 사실 이 날은 내 여행에 있어 큰 고비의 날 중 하나로 기억된다. 새벽 4시 공항버스, 7시 비행기, 7시 반 오슬로 도착, 밤 10시 반 야간기차 탑승(침대칸이 아닌 일반 좌석), 아침 7시 스타방게르 도착. 페리와 버스를 타고 프레이케스톨렌 도착, 그리고 등산.
아아, 나는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토요일에는 야간 기차가 없으므로 무리해서 금요일 날 야간 기차를 타려다 보니 일정이 꼬였다. 물론 스타방게르에서 1박을 할 예정이지만, 일요일엔 비가 올 것이란 일기예보를 봤기 때문에 토요일 등산을 미루기도 어렵다. 오슬로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코인 락커에 캐리어를 맡기고 오슬로 중앙역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새벽부터 움직였더니 정신이 몽롱해 카페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라테 톨 사이즈 한잔과 머핀 하나를 주문했다.
“82 nok입니다.”
“네. 82 nok… 네?”
82 nok,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 3천 원이다. 잠시만, 그럼 커피 한잔이 얼마란 거지? 47 nok, 7,500원. 비싸다. 일단 커피와 머핀을 손에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플레이트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래, 북유럽 물가 비싼 건 이미 체감하고 있었잖아. 거기다 여긴 제일 비싼 노르웨이인데 뭐, 우리나라도 신사동이나 압구정에 가면 8,000원짜리 커피 많으니…”
나는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커피와 머핀을 먹는다. 노르웨이는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곳이다.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가 약 20,000원, 생수 한 병이 4~5,000원. 돈을 아끼려 마트에서 요거트, 낱개 과일, 과자 따위를 몇 개만 잡아도 1~20,000원은 그냥 훌쩍 넘어간다. 나는 앞으로 이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10일을 보낼 것인지 머리를 굴려본다. 무작정 당일에 표를 구입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최대한 할인을 받아 차비를 아끼기 위해 웬만한 버스와 기차는 미리 예약해 두었다.
노르웨이에선 일정이 빡빡하고, 등산이 많으며, 모든 걸 예약하고 왔기에 물릴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다. 북유럽의 그 어떤 나라보다 기대했던 여행지가 바로 ‘노르웨이’였다. 10대 때부터 언제나 20대가 되고 직접 돈을 벌게 되면 가 보고 싶었던 나라 노르웨이. 나는 다시금 끓어오르는 벅찬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스타벅스 영수증을 구겨버린다. 귀에 비틀스의 ‘Norwegian wood’를 틀어본다. 자, 여기는 내가 오랜 시간 꿈꿨던 천국이다.
노르웨이에 오니 자연스레 머릿속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관한 기억들이 열람된다. 상실의 시대의 본 제목이자 영화 속에서 불리는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17살, 책 속의 키즈키가 죽은 나이이다. 그땐 이 책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21살, 나오코가 죽었던 그 나이에 이 책을 다시 읽으니 그리 마음이 사무치게 아프더니 20대 중반부터는 왜인지 모르게 슬픔보단 개운함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오랜 시간 와타나베를 찾고 싶었다기보다는 내 안의 미도리를 늘 찾고 싶어 했다. 누군가를 위한 열렬하고도 사랑스러운,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미도리가 되고 싶어 안달했다. 결국 나는 좋든 싫든, 내 기분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내 기분을 꾸밀 줄 모르게 됐다. 내 기분을 그냥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연애 열등생이 되었고, 항상도 눈으로 나만의 와타나베를 쫓아다녔다. 결국,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찾았으니까. 언젠간 나의 와타나베가 나를 찾아줄 꺼야란 그런 다짐을 하며.
어느덧 20살이어야 할 미도리는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 20대 후반이 되었다.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나의 미도리는 내 속에서 길을 잃어가고, 이렇게 정처 없이 노르웨이 한복판에 서 있다. 노르웨이의 첫인상은 조금 우습지만 ‘노르웨이구나’였다. 말 그대로 황량함을 입고 있는 것이 참 노르웨이답다. 조금 어두컴컴한 하늘과 바닷가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바싹 마른바람은 당장에라도 내 뺨에 부딪혀 가루가 되어 날릴 것 같다. 나는 다른 해 보다 긴 여름을 보내는 듯했으나 어느새 다른 해 보다 더 빨리 가을을 맞이했다. 나는 재킷의 깃을 세우고 찬바람에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회색의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