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의 마지막 날, 카페 놀이
조용한 도시 헬싱키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창 밖의 수많은 이파리들이 거센 바닷바람에 한꺼번에 흔들린다. 트르르르르 날갯짓 같은 소리를 낸다. 마치 가을이 다가와 날개를 비비는 풀벌레 같기도 하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는 철새들 무리 한가운데 서서 그들의 떠나는 날개 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제 이 곳은 진짜 가을이다.
8월 중순, 이르게 찾아온 가을에 나는 몸을 한번 쓸어내렸다. 그리곤 두툼한 티셔츠와 재킷을 걸친다. 호스텔을 나와 트램을 탄다. 참으로 많이 트램을 탔다. 이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고 아련해진다. 오늘은 헬싱키에서의 마지막 날, 내일 아침 비행기로 나는 노르웨이 오슬로로 떠난다. 헬싱키의 마지막 날에 가려고 아껴두었던 ‘까페 우르슬라’에 도착했다. 헬싱키에서 가장 오고 싶었던 까페이자 역시나 카모메 식당의 주요 촬영 장소였던 이 곳. 흐린 날씨 탓에 까페 뒤의 공원도, 까페 앞의 바다도 촉촉하게 젖어 물을 머금은 회색 솜처럼 분위기가 묵직하다. 그래도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까페에 가득 찬 손님들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어본다.
라떼 한 잔과 크로와상 하나를 사 들고 바닷가 앞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카모메 식당 영화 속 4명의 여인들이 주르륵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그곳. 시끌벅적한 카우파토리 마켓에서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의 이 곳은 수많은 갈매기와 참새들이 가득해 새들을 벗 삼아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날이 많이 흐리지만 눈 앞에는 넓디넓은 평온한 바다가 자신의 존재감을 들어내고 있고, 하늘엔 통통한 갈매기가 둥둥 떠 있다. 바닥과 테이블, 의자 위에는 작은 참새떼가 빵 부스러기를 노린다. 이틀 전만 해도 그렇게 에어컨이 그리웠는데 오늘은 까페에서 테이블마다 켜 둔 히터에 깜짝 놀란다.
“벌써 히터 날씨구나. 날씨 한번 희한하네.”
나는 껄껄 웃으며 크로와상의 한 편을 뜯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론 빵 부스러기를 바닥에 뿌려가며 참새들을 맞이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핀란드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까페 우르슬라에서 내가 느끼는 나른한 행복이 느껴진다.
아직도 영화 속에서 일본인 마사코가 핀란드인 리이사의 핀란드어를 통역도 없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미스터리이지만 이럴 때 보면 마음과 눈빛, 표정은 언제나 대화 없이도 통한다는 걸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벨탑에서 파생된 슬픈 외국어들이 진정 태초에는 하나의 언어였으리란 생각을 해 본다. 그때 내 앞에 한 노부부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참새떼를 보며 큰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순간 너무 많은 참새떼에 놀라 팔을 휘젓는다.
“여기 오면 안 돼! 아직 나도 다 안 먹었다고!”
나는 분명 한국말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앞의 노부부가 나를 보며 웃으며 영어로 대답을 한다.
“저 새들도 우리처럼 점심시간인가 보내!”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마사코와 리이사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나는 따끈한 크로와상이 접시 위에서 식지 않도록 크게 한 덩이를 냉큼 떼어내어 입 속에 넣는다. 눈 앞에 다시금 참새떼가 날아든다. 나도 모르게 정말 큰소리로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웃어라!’ 마치 웃음을 부르는 주문 같은 이름의 까페 ‘우르슬라’. 나는 앞으로 웃고 싶을 땐 ‘우르슬라!’라고 외칠 것만 같다.
다시 트램을 타고 에스플라나디 공원 근처로와 한 바퀴를 걸었다. 이제는 익숙한 마리메꼬와 이딸라 매장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포럼으로 걸어가 무민 샵에도 들렸다. 날씨가 많이 흐리고 추워서인지 방금 전에 마신 커피가 또 떠오른다. 나는 다시 트램을 탔다. 사실 헬싱키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또 다른 까페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코, 독일등 몇 나라는 맥주=물이라면 핀란드는 커피=물이다. 길에는 수없이 많은 까페들이 줄지어 서있고, 식사도 커피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헬싱키 내에는 스타벅스가 단 1개밖에 없으며, 공항의 1개 외에는 프랜차이즈 까페를 발견하기 어렵다.
독일 커피협회가 2013년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핀란드 인은 하루 평균 4.1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핀란드 사람들은 1인당 1년에 약 12kg의 커피를 마신다. 그 뒤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1위부터 4위까지 나란히 줄을 서고 있다. 영국 리서치 기관 유로모니터의 결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1위 네덜란드, 2위 핀란드, 3위 스웨덴, 4위 덴마크 등이 이어진다. 이처럼 핀란드인들은 커피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하루의 시작, 식사 후, 나른할 때 언제든 커피와 함께한다. 그래서인지 헬싱키 내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멋진 카페들이 많다.
그중 수많은 까페에 커피를 납품하며 질 좋고 훌륭한 커피로 소문난 ‘카파 로스터리(Kaffa roaster)’ 는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호스텔 리셉션에게 추천받은 까페였다.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카파 로스터리에 도착해보니 커피를 마시러 오기보단 커피를 사러 오는 곳 같았다. 오직 커피 만을 마시고 떠나게 만드는 작은 바만이 존재하는 이 곳은 핀란드 내 유명 까페, 식료품 및 회사, 커피 애호가들이 커피를 사러 온다고 했다.
나는 드립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내부를 둘러본다. 하루에도 수십 번 테이스팅을 하고 로스팅을 한다는 카파 로스터리의 커피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부드러운 맛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의 명성을 듣고 꽤 무겁고 깊은 향과 맛을 예상했던 나에게 이 산뜻한 커피의 맛은 “역시 헬싱키!”란 감상을 안겨준다.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대화 중에 수없이 새로운 잔을 채우고, 하루의 운을 아침의 커피맛으로 점치는 헬싱키 사람들에게 깊고 진하기 보단 향기롭고 부드러운 이 커피가 참으로 어울린다.
예쁜 직원 아가씨의 배웅을 받고 나와 바로 옆, 인테리어+디자인 소품 숍인 모코 마켓을 둘러보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5시가 다 되어간다. 큰일이다. 나는 오늘 5시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무료로 진행되는 파크 콘서트를 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 파크콘서트 페이스북에서는 오늘 날씨가 좋지 않아 장소를 야외에서 실내로 옮겼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야외 공연을 기대했던 나로선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아직 풀밭이 축축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페이스북에 적힌 주소를 따라 버스를 탔다. 도착한 곳은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시민회관 같은 장소였다.
내부에는 아직 관객들이 몇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나를 발견한 프로그램 담당자들은 환히 웃으며 프로그램을 나눠주고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음? 시벨리우스가 아니잖아!’ 시벨리우스 공원의 파크 콘서트라고 해서 당연히 시벨리우스의 곡을 연주할 줄 알았던 나는 바흐와 코다이가 소개된 프로그램을 읽으며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 이 곳은 WiFi가 잡혔고 나는 급히 프로그램을 촬영해 피아니스트인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다.
-이거 어때? 코다이? 바흐는 그렇다 치고 코다이는 너무 생소한데…
-아이고, 첼로에 댄스라니, 거기다 코다이? 엄청난 공연이네.
-나 이상한 곳으로 온 거야?
-이상하다기보다, 좀 난해한 공연인 것 같은데. 엄청난 시간이 되겠구먼. 즐기며 듣고 와.
친구는 문자 내내 웃음표시 ‘ㅋ’를 남발했고, 나는 잠시 후 이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헝가리 음악가인 코다이의 음악이 생소해서 일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난해하게 느껴졌고, 그에 맞춰 헬싱키의 주목받고 있는 영 아티스트로 소개받은 2명의 남녀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내가 느끼는 난해함은 좀 더 부피가 커졌다. 춤은 점점 행위예술로 변해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공연 내내 ‘?’란 표정을 지으며 공연을 관람했다. 그래도 연주가 무척이나 훌륭했기에 모든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모두 크게 기립 박수를 쳤다. 공연이 끝나고 행사 프로그래머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여성은 이 곳에 외국인이 온 건 처음인 것 같다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핀란드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오늘 공연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공연장을 나갈 때 그녀는 나를 부르며 얼마나 이 곳에 머무냐고, 주말에 올해 여름의 마지막 공연이 있으니 한번 더 방문할 순 없는지 물었다.
“아쉽지만 전 내일 아침에 핀란드를 떠나요.”
나의 대답에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허그를 해 준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고마워요,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사람들. 아, 정말로, 진짜로 내일 나는 이 곳을 떠난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정처 없이 헬싱키 시내를 걸었다. 백야지만 하늘이 검게 변할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싶었다.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헬싱키는 내게 ‘여행’이 아닌 이 곳에서의 ‘삶’을 꿈꾸게 했다.
나는 여행이 끝난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좋았던 곳이 아닌 가장 살고 싶었던 곳으로 ‘헬싱키’를 꼽았다. 헬싱키는 탐험이나 모험이 아닌 편안하고 여유로운 무기력함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가끔은 정말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존재한다. 무기력함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게으름, 그 위에 걸쳐진 잠이란 존재가 느릿느릿, 노곤 노곤한 걸음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이 무기력함을 잊고 살았다. 아니 이 무기력함을 두려워했고 걱정했다. 사실 여행에 와서도 나는 무기력하고 나른한 시간을 조금 아깝게 여겼던 것 같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쳐야 할 것 같고,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고, 늦잠을 자고 낮잠을 자면 조금의 죄책감 같은 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헬싱키를,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여름날의 차가운 베개보다 더 복실 거리는 이 나른한 존재를 꼭 껴안고 부비적 거리며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 푹 안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핀란드의 대표 초콜릿 브랜드 ‘파제르’가 운영하는 파제르 카페에서 나는 헬싱키의 마지막 밤을 떠나보낸다. 까페 안에서는 한 아카펠라 그룹이 ‘I love coffee~ I love tea’란 가사로 시작하는 ‘Java jive’란 곡을 부르고 있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잔, 쌉쌀한 초콜릿 하나를 헬싱키의 마지막 만찬으로 정했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 달달하게 울려 퍼지는 아카펠라 선율, 환하게 웃으며 커피와 함께 늦은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 나는 이 좋은 도시와 좋은 사람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나는 분명 곧 다시 이 곳에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나의 룸메이트 유키코가 몇 번이나 이곳에 다시 돌아왔듯나 역시 똑같은 시기, 똑같은 곳에서 다시 웃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