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모메 식당 속 그 식당의 소소한 한 끼
이번엔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갔다. 헬싱키에 올 때부터 꼭 들리고 싶었던 ‘카아 펠리’를 가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다시 비를 한두 방울씩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나는 버스 밖, 흐리디 흐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노란 햇살이 유치원생의 그림처럼 환하게 뒤엉켜 있더니, 오늘은 흐린 수채화처럼 어둡게 젖어있다. 나는 바다에 가깝게 낮은 비행을 하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헬싱키 시내와는 확연히 다르게 건조함이 느껴지는 회색 공터에 내렸다.
길을 건너 앞으로 나아가니 눈 앞에는 ‘카아 펠리’라고 붉게 적힌 건물들이 보인다. 헬싱키의 예술인 단지 ‘카아 펠리’. 옛 노키아 공장 건물들을 개조하여 예술인들에게 작업실로 제공하고 있는 이 곳은 갤러리이자 작업공간, 그리고 소품들을 판매하고 작가들간의 예술적 교류가 일어나는 예술공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장흥 아뜰리에 같다.
일전에 장흥 아뜰리에에 갔을 때의 황량한 길 위에 유명 팝아티스트 이동기 선생님의 ‘아토마우스’가 크게 그려진 그 건물을 보며 참, 이렇게 외딴곳에 아뜰리에 단지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곳 역시 꽤나 조용하고 외딴 동네에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갤러리도 있지만 대부분 작가들이 작품을 진행하는 걸 구경하는 수준의 작업실들로 가득 해나는 마치 스파이라도 된 마냥 창문 사이사이에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들의 작품 활동을 감상했다.
여기저기 작가들의 작업실을 기웃거리다 보니 금세 피곤해진다. 나는 카아 펠리 1층에 있는 카페 'Hima & Sali'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카아 펠리 만큼이나 유명한 카페 'Hima & Sali'. 헬싱키 예술인들의 미팅 포인트중 하나라는 이 곳은 값싸고 질 좋은 커피와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세련된 가게의 인테리어에 감탄하고, 창밖에 펼쳐진 바다에 감탄한다. 그리고 내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헬싱키의 예술가들이 아닐까 싶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이 난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언제인지도 모르게 커피를 모두 마셔버렸다. 카아 펠리 앞바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어느새 비가 멈추고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헬싱키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떠나간다.
호스텔로 바로 돌아가기가 너무 아쉬워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멍하니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 다시 호스텔 반대쪽으로 가는 트램을 탔다.
‘카모메 식당을 가자.’
사실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카모메 식당을 갔었다. 하지만 하필 그 날이 카모메 식당의 휴일이었고 나는 쓸쓸히 주린 배를 안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또 한번 카모메 식당에 들렸으나 이번엔 영문도 알 수 없이 카드가 작동하지 않았다. 가게 근처에 ATM도 없어서 결국 또다시 씁쓸하게 가게를 나왔다. 무려 2번이나 실패했던 카모메 식당. 인연이 아니려니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결국 또다시 이 곳을 찾았다.
나는 음식이 나오는 영화를 참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류의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뭔가가 잔뜩 먹고 싶어 진다. 이건 당연한 건가? 처음 카모메 식당을 보고 나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삼각김밥 2개를 사 들고 집으로 왔었다. 그리곤 따뜻한 커피를 내려 머그잔에 준비하고 삼각김밥 2개를 데워서 야금야금 먹었다. 물론 카모메 식당의 그 정갈한 소울푸드 오니기리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뭐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요리, 그 속에 소소한 정과 인생의 즐거움이 느껴졌던 조용조용 예쁜 영화 카모메 식당.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아니 아직도 참 좋아하는 영화로 손꼽는다. 나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하기도 하고 불편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끔 혼자 밥 먹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웃고 싶을 때이다. 아마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다음날 친구를 만나 따끈한 짬뽕을 먹었던 것 같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늦여름 날, 살짝 싸늘해진 오후. 짜장면을 깨끗이 비운 친구를 바라보며 짬뽕국물을 들이키던 나는 ‘역시 음식은 함께 먹는 게 좋구나.’ 같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혼자 여행을 하면 대부분 혼자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영화 속의 정이 그리웠고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했나 보다. 웬만해선 3번이나 같은 식당을 찾지 않는데 나는 결국 또다시 이 곳에 도착해 음식을 주문했다.
헬싱키에 존재하는 실제 카모메 식당은 일본요리가 아닌 핀란드 가정식을 판다. 나는 여러 메뉴 중 고민 끝에 프라이드 살몽을 주문했다. 영화 속 사치에는 핀란드와 일본의 공통점이 연어를 주식으로 먹는 점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나는 한국에서 일 년 동안 먹을 연어는 다 먹은 듯하다. 점심도 연어, 저녁도 연어. 내부 인테리어가 영화랑 너무 달라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혼자 테라스에 앉아서 밥 먹는 내내 영화가 떠올라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연어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 씹는다. 창 밖에 지나가던 핀란드 청년과 아주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인사를 해 준다. 이 소소한 행복. 이걸 위해 여기 핀란드에, 헬싱키에, 카모메 식당에 왔다. 나는 이 곳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나는 비로소 헬싱키에 온 모든 목적을 달성한 기분이다.
소소한 행복과 여유, 그리고 휴식. 나는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배뿐만 아니라 마음속이 가득히 차오른다.
음식이란 것은 그저 생계를 위해 본능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 보다 더 많고, 큰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음식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며, 위로를 준다.
너무 피곤한 날, 아픈 날, 힘든 날, 슬픈 날, 괴로운 날, 외로운 날... 한 번쯤 과자나 빵, 케이크를 무작정사 들고 집으로 와서 먹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정신이 어디론가 빠져서 이게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피곤한 날도 있지만 확실한 건 이 음식은 나의 배뿐만 아니라 나의 공허한 마음도 조금씩 채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 가득, 뱃속 가득 영화 카모메 식당의 따뜻함을 채우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유키코가 과자와 맥주를 나눠 준다. 우리는 탁자에 앉아 유키코가 일본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맛의 과자와 핀란드 맥주를 먹으며 수다를 떤다.
“유키코, 이거 진짜 맛있다. 최근에 먹은 어떤 과자보다 맛있는 것 같아!”
나는 과자를 나눠먹고, 맥주를 함께 마시며, ‘함께’란 시간을 보내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 방은 또 다른 카모메 식당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