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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an 10. 2016

친절하고 따뜻한 헬싱키의 마켓

8월, 핀란드의 추위가 다시 시작된다. 

헬싱키에서 며칠을 보냈음에도 불고하고 아직 대성당과 우스펜스키 사원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이었다. 보통 헬싱키 관광을 하면 1번으로 방문한다는  그곳들. 호스텔 라운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여자분이 물었다. 


“헬싱키에서 일주일이나 계세요? 뭐 하시려고요?” 

“아… 음… 커피 마시려고요?”


나의 말에 그녀와 나는 잠시 동안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사람 대부분이 핀에어 경유를 통해 1~2일 정도 머문다는 헬싱키. 나는 참으로 게으르게, 언제나 늦잠을 자고, 근교도 한번 가지 않고 헬싱키 시내 위만을 산책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의 질문이 떠올라 대성당과 우스펜스키 사원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웬일로 아침 일찍 일어나기도 해서 나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날이 추워졌다. 가죽자켓... 가져올 땐 후회했는데 ㅎㅎ


“으아, 왜 이리 추워?”

어제까지 한여름이었던 헬싱키가 하루 만에 늦가을이 되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뛰어가 가방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긴 팔 티셔츠와 가죽 자켓을 꺼내 입었다. 북유럽 날씨가 추울걸 예상해서 가을 옷을 챙겨 오긴 했지만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땐 날이 너무 더워 무겁게 가져온가을 옷을 다시 한국으로 보낼까 잠시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날이 추워졌다. 참으로 신기하게 말이다.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날씨가 변하다니. 여름이 참 짧긴 짧구나.”

어제까지 민소매 차림이던 길거리 사람들이 오늘은 패딩점퍼를 입고 있다. 나는 이 신기하고도 놀라운 북유럽의 날씨에,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의 모습에 다시 한번 당황했다. 


우스펜스키 사원


나는 카우파토리 광장으로 가는 트램을 탔다. 카우파토리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우스펜스키 사원, 맞은편에는 대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발걸음을 옮겨가며 두 곳을 돌아다녔다. 일주일에 2번, 낮 12시 대성당에서는 오르간 연주가 있어 나는 그 연주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하나 바보 같게도 그 연주가 우스펜스키에서 하는 줄 알고 나는 우스펜스키 사원으로 일찌감치 달려갔고 12시가 다 되도록 조용하기만 한 사원 내부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오늘은 조금 늦게 하나보다 싶어 12시 반까지 멍하니 사원 안에 앉아 있었다. 12시 반이 되어도 연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날짜를 착각했나 보다.” 라며 헬싱키 대성당으로 갔다. 


헬싱키 대성당 문 앞에 서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대성당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문 앞에는 현재 오르간 연주가 있기 때문에 12시 50분은 되어야 입장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야속할 정도로 대성당의 문은 두껍고 단단했으며 작은 소리 하나 밖으로 세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대성당 앞에 펼쳐진 길고 넓은 계단에 자리를 잡는다. 파리의 몽마르트가 떠오르는 하얀 돔과 헬싱키 시내를 내려보게 되는 높고 넓은 계단. 그때였다. 한 방울씩 물방울이 뺨 위로 쏟아진다. 하늘을 보니 하얀 돔 앞으로 짙은 회색 빛 구름이 침대 아래 쌓인 먼지처럼 데구루루 굴러 온다. 


헬싱키 대성당


비의 양이 많진 않아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망부석처럼 계단에 앉아 길가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일부는 우산을 펴거나 건물 안으로 달려가 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따스한 봄날, 햇빛을 시샘해 차갑게 불어온 한줄기의 바람과 마주한 듯 그리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그대로 자신이 하던 일을 한다. 나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도 이제 이 장소에 많이  익숙해졌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타지에서 여행의 낯섦이 아닌 익숙함이 느껴진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왠지 언젠가 다시 여길 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시절 친구의 집을 방문하듯, 오래전 떠나온 고향을 방문하듯, 이 익숙함은 언젠가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이끌 거란 몸과 마음의 운명적인 약속 같다. 


잠시 후 대성당의 문이 열렸다.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아직 오르간의 울림이 남아 있는 듯한 높은 천장과 텅 빈 의자를 본다. 밖에서 보이는 것에 비해 내부가 좁아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았다. 천장에 가까운 곳에 설치된 텅 빈 오르간을 보며 귀를 텅 비운 체 나가야 하는 이 상황에 아쉬움을 느낀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시 계단에 주저앉아 지도를 폈다. 지도 위에 빗물이 떨어져 젖어간다. 

“우산을 가져 나올 걸 그랬나.”


호스텔로 다시 돌아가 우산을 가져올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 축축하게 젖어드는 공기가 왠지 내가 항상 상상하던 북유럽의 모습과 꼭 같아서, 그냥 한번 이대로 걸어보자 싶었다. 

나는 지도에서 디자인 박물관의 위치를 확인하곤 트램도 타지 않고 그 길로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입장권이 아닌 박물관 안의 작은 카페로 뛰어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켰다. 

요즘 세계적으로 북유럽 스타일이 뜨고 있고, 특히 핀란드의 디자인과 가구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디자인 박물관은 핀란드 디자인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오늘날 산업 디자인의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외관이 일반적인 디자인 박물관과는 딴판인 고풍스러운 느낌에, 딱히 이 곳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나에게 이 곳은 기대 이상의 흥미로운 장소였다. 핀란드의 국민영웅인 알바 알토는 물론 카이 프랑크, 요한나 글릭센, 브랜드 이딸라와 아델라, 아리카, 피스카스 등 다양한 디자이너와 디자인 브랜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 마리 타피 오바라의 작품들이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는데 일 마리 타피오바라는 ‘도무스’ 시리즈로 유명한 핀란드 대표 디자이너이다. 


사실 나는 헬싱키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디자이너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묵고 있는 도무스 아카데미카 호스텔의 내부 가구들 중일부가 일마리 타피오바라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박물관을 돌다 피곤하면  한쪽에 직접 앉아 볼 수 있게 진열된 유명 디자이너들의 의자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었다. 의자 하나에 엄청난 가격을 부르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대표 디자인 위에 직접 앉아보고 기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척이나  흥분시켰다.



 마침 박물관 내부에 사람도 별로 없어 나는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앉아 박물관에 비치된 책들을 열람했다.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힘든 시기를 오랫동안 겪었던 핀란드. 세계 2차 대전 이후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핀란드의 풍부한 자연자원들은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자연친화적이면서도 편안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핀란드 가구들을 탄생시켰다. 엄청나게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하고 따뜻한 핀란드의 가구들은 수수하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핀란드’ 이 나라를 꼭 닮았다. 


박물관을 나올 때 즈음 내 뱃속은 꼬륵 꼬륵 헬싱키 항구의 갈매기 같은 소리를 낸다. 박물관 근처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이 하나도 없다. 나는 다시 지도를 주섬주섬 꺼내 이리로 돌리고 저리로 돌려 보았으나 마땅히 가고 싶은 곳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박물관에 들어가 WiFi를 이용해 근처 마켓을 검색해 보았다. 카우파토리말고도 헬싱키에는 여러 마켓이 있다. 가장 유명한 항구의 카우파토리 마켓 말고도 카모메 식당에도 나온하카니에미 마켓이 있고, 실내 마켓인 카우파하리 마켓이 있다. 나는 마침 이 근처에서 버스를 타면 카우파하리를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찾아냈고 버스를 타고 카우파하리로 갔다. 


히에타라하티 마켓

“어? 여기 히에타라하티 마켓이잖아!” 

버스에서 내린 곳은 헬싱키 내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 열리는 히에타라하티 마켓이었다. 비록 주말이 아니라 수가 많진 않지만, 길에는 많은 상인들이 엔틱, 중고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는 카우파하리 살루홀 이라고 적힌 실내 시장 건물이 서 있었다. 


“와, 진짜 잘됐다. 벼룩시장 와 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운이 참 잘 따라주나 보다. 나는 배 속에서 꼬륵 거리는 갈매기를 잊은 체  여기저기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오래된 스카프부터 마리메꼬의 최신 제품들, 오래된 타자기와 핸드메이드 주얼리 등 다양한 물건들이 좁은 탁자들 위에 쏟아질 만큼 가득 차 있다. 옷을 한번 꺼내 어깨에 걸쳐보기도 하고, 구두를 신어보기도 하고 가방을 걸쳐보기도 했으나 딱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 그때 마침 내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손짓으로 부른다. 



“뭐 찾고 있어요? 우리 테이블도 한 번 봐요.”

사실 이 곳 벼룩시장은 호객 행위라는 게 전혀 없었다.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며 테이블을 지킬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밝게 웃으며 나에게 손짓하는 아주머니는 장사를 하는 가게 주인이라기보단 “우리 집에 예쁜 옷들이 많으니 구경 와!”라고 말하는 앞집 아주머니 같았다. 막상 테이블로 가니 아주머니는 또다시 자신의 일을 한다. 나는 혼자 행거를 뒤적이며 옷들을  확인했다. 그러다 귀여운 스카프 하나가 눈에 띈다. 예전부터 하나쯤 가지고 싶었던 스타일이다. 


“이거 얼마예요?”

“4유로야. 100프로 코튼, 나름 브랜드에서 구입했던 거야.”

“4유로요? 음…”

나의 망설임에 아주머니는 갑자기 깔깔 웃으며 1유로에 가져가라고 말한다.


“우와, 1유로요?”

나는 분명 기쁜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내가 흥정을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럼 그냥 50센트에 가져가. 어쨌든 거래는 해야 하니까.” 


50센트? 우리 돈으로 1천 원도 되지 않는 돈.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이 곳에 판매를 하러 왔다기 보단 무료한 일상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러 온 것만 같았다. 마켓 광장을 둘러보니 대부분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목적으로 이 곳에 테이블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나는 기쁘게 스카프를 구매했고, 그녀는 나에게 이 스카프를 예쁘게 매는 법을 알려주었다. 

“머리에 이렇게 매면 예쁘단다.”


카우파하리

나는 그녀에게 목례를 하고 카우파하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배가 엄청나게 고파졌다. 생각해 보니 오늘 커피 한잔 외에 먹은 것이 없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수프나 간단한 샌드위치 같은 요깃거리를 파는 곳들도 있었다. 나는 연어가 올라간 곡물빵이 맛나게 비치되어 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곤 바로 콜라 한잔과 연어가 올라간 곡물빵을 주문했다. 스오파케티오(soppakeittio). 빵을 먹다 알게 된 이 가게의 이름이 너무나도 익숙해 급히 가방에서 론리플래닛을 꺼내 뒤적거렸다. 이 곳은 헬싱키에서 꽤 유명한 수프 전문점으로 실내 마켓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설명이 적혀있었다. 


스오파케티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들어 해산물 수프 한 그릇을 주문했다. 구름이 많이 걷히긴 했으나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해산물이 넉넉하게 들어있는 수프 한 그릇은 온몸을 녹이고 장기를 춤추게 한다. 비릴까 봐 걱정했던 수프는 깊고 진하며 담백한 맛으로 입안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아까 구입했던 연어가 올라간 곡물빵을 베어 문다. 신선한 연어와 처음 맛보는 하얀 소스, 그리고 납작하게 눌린 곡물빵이 고소하게 씹히며 잘게 찢어져 혓바닥에 달라붙는다.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너무 맛있다.”란 말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유명한 가게란 소개 덕분인지, 무척이나 시장했던 내 배 때문인지, 나는 정말 순식간에, 무척이나 즐겁게 모든 음식을 해치웠다. 나는 흡족한 식사를 끝내고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며 건물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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