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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an 03. 2016

헬싱키의 여름날 조우한 무민

식어버린 커피처럼 조금 아쉽게 조금 슬프게 북유럽의 여름이 식어가고 있다

알토 하우스를 나와 내가 곧장 간 곳은 아테네움이었다. 핀란드 최대의 국립미술관인 아테네움은 그 존재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내가 이 곳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토베 얀손’의 특별전 때문이었다. 


토베 얀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핀란드의 국민 캐릭터 ‘무민’을 탄생시킨 만화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종합적인 예술을 추구한 예술가이다. 이번 전시회는 토베 얀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기획된 전시로 그녀의 다양한 예술 세계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였다. 특히  무민뿐만 아니라 그녀의 환상적인 추상화, 초기 인상파적 작품들,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전시였다.  

토베 얀손, 그녀가 탄생시킨 캐릭터 무민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얗고 귀여운 하마의 형상을 한 무민은 사실 ‘트롤’이다. 우리는 흔히 반지의 제왕 속 토롤과 같은 도깨비의 형상을 떠올리지만 토베 얀손은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엉뚱한 이미지를 가진 트롤 ‘무민’과 그의 가족, 친구들을 탄생시켰다. 


항상 어디론가 모험을 떠나는 무민 파파, 상냥한 무민 마마, 무민의 여자친구 스노크 아가씨,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독설가 꼬마 미이, 겨울이 오기 전 마을을 떠나 봄이 되면 돌아오는 방랑자 스너프킨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모험은 어린이용 동화라고 하기엔 그들의 모험은 언제나 성공보다 실패가 많고, 주변과 타협하고 어울리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제부터였는진 잘 모르겠지만 나는 토베 얀손의 히피스런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하곤 했다. 소녀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말괄량이 같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서 요정같이  뛰어다녔던 짧은 단발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토베 얀손. 머리에 화환을 쓰고 삐죽거리며 입술을 내미는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에 알 수 있다. 그래도 무민의 큰 인기 때문인지 전시의 반 정도는 무민과 관련된 이미지와 무민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녀가 거쳤던 과정들이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 무민에 국민 캐릭터임에 틀림없는 게 수많은 사람들이 무민 관련 전시실에 터질 듯 모여있었다. 



나는 무민의 많은 캐릭터 중 스너프킨을 참 좋아한다. 토베 얀손의 실제 연인을 모델로 탄생한 스너프킨은 자유롭고 여행을 좋아하며 한 곳에 머물기 싫어하는 조용한 방랑자이다. 토베 얀손은 야속하게도 언제나 자유롭게 자신의 곁을 떠났다,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그 때문에 느끼는 고독함과 외로움을 이 스너프킨에 모두  집어넣은  듯하다. 스너프킨의 표정은 언제나 우수에 차 있고 차분하다. 꼬마 미이가 그의 여동생이란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나는 양 손 가득 무민 관련 제품을 사들고 아테네움을 나왔다. 아테네움을 나온 후에도 꽤 오랜 시간 토베 얀손의 개구진 웃음과 자화상 속 먼 곳을 응시하는듯한 공허한 표정이  오버랩되어 눈 앞의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렇게 나의 영웅 중 한 명과 또다시 작별을 나눴다.




아테네움을 나와 근처 마리메꼬에서 상큼한 파란색의 에코백을 사고 기분 좋게 호스텔로 돌아간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은데도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아스팔트 도보 위에 5센티 정도 몸이 떠 있는 느낌이다. 백야로 인해 저녁 8시가 다 되었지만 하늘은 대낮처럼 환하다. 분명히 저녁 시간인 걸 알면서도 날이 밝다 보니 놀이터의 어린아이처럼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이렇게보니 눈이 아프네 ㅎㅎ 마리메꼬 매장 안, 저기 파란색 가방을 샀다 :) 


나는 호스텔 방향에서 살짝 몸을 틀어 발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발걸음은 가벼워 마치 모노레일 위에 탑승한 듯 몸이 앞으로 자동적으로 쓸려간다. 30분을 조금 넘게 걸어 시벨리우스 파크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바다와 숲이 함께 있어 당장이라도 작은 요정이  날아올 것 같은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이 곳은 핀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국민영웅 시벨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시벨리우스는 예술성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추앙받는 인물로 그가 작곡한 애국 교향시 ‘핀란디아’는 스웨덴 하에서 러시아의 지배까지 꽤 아픈 역사를 지닌 핀란드의 국민 찬가로 울려 퍼지고 있다. 핀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던지, 핀란드 정부는 그가 곡 작업에 들어갈 때면 그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선 비행기도 날 수 없게 제한했다고 한다.


국민영웅의 이름을 딴 국민들의 아름다운 쉼터 시벨리우스 공원. 바다를 감싸며 빽빽하게 들어선 전나무와 자작나무들, 바닷가를 달리는 사람들, 눈부신 햇살이 어우러져 한편의 아름다운 공연을 보는 것 만 같다. 그리고  그곳에는 ‘레가타’ 란 이름의 작고 아름다운 노천 카페가 있는데 전망이 어찌나 좋은지 여름에는 항상 줄을 서야만 한다고 했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길고 긴 줄에 몸을 끼워 넣고 나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줄에는 외국인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본다. 그들은 긴 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짜증도, 불편도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미술관의 관람객처럼 아름다운 바다와 숲이 만들어낸 작품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다. 십여 분 후 나는 커피 한 잔과 시나몬 롤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바닷가 근처 다행스레 비어있는 작은 테이블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시나몬 롤을 한입 베어 물며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귀에 꽂힌 이어폰 안으로 마치 지금 이 바다와 바람, 햇살을 위해 작곡한듯한 조용하고 느린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시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본다. 


내 앞, 빨간 담요를 걸친 세 명의 소녀들이 세상 그 어떤 그늘도 만나 본 적 없는 것처럼, 뜨겁게 빛나는 노을을 뚜렷이 마주하고 앉아있다. 빛나는 그녀들 사이로 깊은 바다가 짙은 어둠처럼 깔려 있다.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짙고, 절대 우리의 힘으론 깨 부술 수 없을 듯 한 엄숙한 힘마저 느껴지는 바다. 자기네들끼리 몸을 부딪혀 부서지는 보석들이 노을 아래에서 반짝인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앞의 세 명의 소녀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다. 분명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녀의 입술의 움직임에서 반가운 인사가 느껴진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나 역시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한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해가 저 멀리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지 조금 싸늘한 바람이 내 팔을 스친다. 


나는 하늘을 본다. 

어느새 구름마저 젖은 창문의 성애처럼 흐릿하게 남아 흔적을 지워간다. 그토록 뜨겁던 북유럽의 여름이 떠나가나 보다. 갑자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식어버린 커피처럼 조금 아쉽게 조금 슬프게 여름이 식어가고 있다. 

여름이 끝나는게 아쉬워 호스텔에서 맥주 한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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