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ther Feb 28. 2016

언제나 도시들은, 마지막 날엔 눈부신 석양을 선사한다.

폭우 속, 은빛이 되어버린 골든루트

폭우 속, 은빛이 되어버린 골든루트 

(헬레쉴트->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달스니바 전망대-> 트롤스티겐)


오늘은 헬레쉴트->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달스니바 전망대-> 트롤스티겐을 거쳐 온달스네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이동이 많은 하루다. 


노르웨이 관광청에서 시간에 맞춰 피오르드를 관람할 수 있게 짜 놓은 골든 루트는 노르웨이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코스 중 하나이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다 차를 놓치면 오늘 안에 오슬로로 돌아갈 수 없기에 나는 아침 8시 페리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 짐을 싸고 호스텔의 조식을 먹으러 뛰어내려 갔다. 


내려가서 조식을 결제하고 식당으로 들어가니 연이어 어제 버스 멤버들이 주르륵 내려온다. 모두들 나와 같이 오늘 하루 골든루트를 돈다. 일부 일정이 조금 달라 중간에 숙박을 하는 사람도 있고 오슬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단 우리 모두 아침 8시 페리를 타야 하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8시 페리를 놓치면 점심시간에나 페리가 있다는 리셉션 청년의 말에 모두들 잔뜩 긴장을 하고 입 안에 샌드위치를 밀어 넣는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려는 순간 길버트의 어머니가 소리친다.


“아가씨들 점심 도시락 내가 다  결재했으니 하나씩 받아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샌드위치 하나 정도는 사주고 싶네!”
호스텔에서 판매하는 점심 도시락을 모두  결재했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본다. 

“어서 출발해야지! 어서 가져가!”

“가, 감사합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에 인사말을 건네는 초등학생들처럼 입을 모아 소리쳤다. 샌드위치까지 가방에  집어넣고 전속력을 내 페리로 달려간다. 사실 아직 여유가 조금 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모두는 한마음으로 조급해졌다. 아침부터 참으로 부산하다. 겨우 선착장에 도착했으나 우리 외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선착장이 아닌가?”

“우리가 시간을 잘 못 안거 아니에요?”  


그렇게 5분 정도 멍하니 주변을 살피는데 갑자기 우리 뒤로 커다란 관광버스 몇 대가 섰다. 그리고 우르르 쏟아지는 단체관광객 무리. 순식간에 선착장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우리 근처에 정박 해 있던 페리의 문이 열렸다. 


날이 꽤 흐리고, 한겨울 날씨처럼 춥다. 비싸긴 하지만 페리 안에서 판매하는 커피 한잔을 사 들고 갑판 위로 나갔다. 비는 가랑비처럼 쏟아지지만 무척이나 흐린 하늘과 그 속에 베개 솜처럼 뭉쳐진 구름들이 오늘 폭우가 내릴 거란 걸 암시하는  듯했다. 


“큰일이네, 나중에 전망대 가면  아무것도 안 보일 것 같아.” 

어제 같은 버스를 탔던 스웨덴 청년들이 가벼운 아침인사와 함께 날씨 이야기를 건넸다. 웬만한 비와 궂은 날씨엔 슬퍼지지 않았던 나였지만 골든루트의 하이라이트인 달스니바 전망대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에도 얼굴에도 잔뜩 먹구름이 밀려온다. 


패딩 위에 가죽재킷을 껴 입어도 추운 날씨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앞에 펼쳐진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바라보았다. 가파르게 깎인 절벽과 그 사이 크고 작은 여러 폭포들이 펼쳐지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무서울 지경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 아닌 웅장하고, 장엄한 자연. 요정의 숲이 아닌 대지의 여신이 사는 곳. 

이 풍경을 바라보니 참으로 나란 사람, 이 인간이란 존재가 작게만 느껴진다. 나의 감상에 화답이라도 하듯 엄청난 광풍과 함께 비가 쏟아져 나는 결국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페리 안에서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설명하는 안내 가이드가 흘러나왔다. 한국어 안내도 있는 것 같다는 사람들의 말에 페리 안 매점 직원에게 안내를 물어보았으나 단체 관광객의 경우 방송을 틀어 준다고 했다. 

순간 나는 페리 안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어느 나라인지 모를 백인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사이에 한국인 7명이 있으니 나름 단체라면 단체가 아닐까? 뭐, 이미 시간도 30분 이상 흘렀고 나는 안내 가이드를 포기하고 중앙 소파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 흘러 게이랑에르에 도착했다. 


5월부터 9월 사이 전 세계 약 70만 명의 여행객들이 찾아온다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게이랑에르. 게이랑에르에 도착하니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쏟아졌나 싶을 만큼 노르웨이에서 지나친 어느  관광지보다 더욱 붐빈다.


나는 당장 달스니바 전망대로 가는 표를 구입하기 위해 인포메이션으로 달렸다. 인포메이션에 도착하니 10시 표는 모두 매진이라고 한다. 그리곤 12시 표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 표를 구입할 것을 권유했다. 

“안돼요, 전 오늘 3시까지 온달스네스로 가야 해요. 10시 표를 구할 다른 방법은 없나요?”


나는 낮 3시 20분 온달스네스에서 오슬로로 떠나는  기차표를 이미 예매 해 둔 상태였다. 만약 10시 달스니바 전망대로 가는 버스를 타지 못하면 나는 결국 달스니바 전망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뒤늦게 내 뒤로 걸어온 자매와 모자, 다른 한국인 여성 2분이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달스니바 전망대 표가  매진됐데요.” 

나의 말에 자매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를 해 두었다고 했고, 모자와 여성 2분은 12시 버스표를 사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망연자실해 인포메이션을 빠져나왔다. 


“혹시 버스기사 분한테 물어보면 표가 있지 않을까요? 분명 취소되거나 오지 않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자매 중 동생이 나에게 묘수를 던진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 마음을 먹고 일단 길고 긴 달스니바 전망대 행 버스 줄 사이에 섰다. 그리곤 곧 사람들이  탑승하는 걸 지켜보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탑승하자 버스 기사에게 간곡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


“표가 없으면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이미 온달스네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표를 끊어놓은 상태라 지금 이 버스를 못 타면 여기까지 와서 달스니바 전망대를 보지 못하고 가게 돼요. 부탁드립니다. 남는 자리가 없을까요?”


나의 울먹이는 표정에 할아버지 버스 기사는 웃음을 짓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버스 기사 뒤에 서서 사람들이 탑승하는 걸 지켜보았다. 


“자, 다행히 저기 너의 자리가 남아 있네. 표는 여기서 결재하고 들어가 앉아요!” 

할아버지 버스 기사님은 뒤에 남아있는 2자리를 가리키며 윙크를 한다. 

“우와!! 너무 감사해요!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버스는 쏜살같이 길을 나선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작고 아름다운 게이랑에르 마을에서 출발한 이 버스는 중간중간 아름다운 구간마다 버스를 잠시 세워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그런데 아까의 우려대로 20여분 잠시 잠잠했던 하늘은 또다시 폭우를 쏟아낸다. 용의 한숨처럼 새하얀 수증기들이 시야를 가린다. 거기다 길은 어찌나 구불구불 어지럽던지 뒷자리에 앉은 꼬마는 결국 멀미를 시작했다. 요리조리 이 구불거리는 길을 달리는 버스가 불안해 나 역시 침을 꼴깍 삼켰다. 바로 차창 밖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절벽들이다. 



“달스니바입니다. 15분 후 출발해요! 15분 안에 돌아오세요!”

버스 기사님의 말에 모두들 우르르 버스 밖으로 나간다. 하나 눈 앞에 보이는 건 새하얀  안개뿐이다. 지금 여기가 무릉도원일까? 신선들이 살고 있는 그런 구름 속 같다. 달스니바 전망대 그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건 새하얀 구름. 사진을 찍어보아도 보이는 건 구름과 그  사이사이 바닥에 관광객 들이쌓아둔 소원을 비는 돌탑이 신비롭게 서있을 뿐이다. 


골든 루트가 아니라 실버 루트 구만… 눈에 보이는 게 새하얗고 은빛 나는 구름뿐이네.


실망스러움에 우비 호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고 잔뜩 부풀린 볼로 성난 복어처럼 전망대 난간에 섰다. 하나 내 주변에 선 가족들과 노부부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긴, 어떻게 보면 1년의 대부분이 비가 오는 노르웨이의  참모습이 이 모습인 걸지도 모른다. 


밝고 화창한 날, 그게 노르웨이에선 더 이상하고 독특한 날일 것이다. 비 오는 슬픈 날이 아닌, 비 오는 언제와 같은 평범한 하루. 나는 말 그대로 평범한, 보통의 노르웨이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 현지인들도 잘 못 본다는 햇빛을 내가 바라면  안 되지.” 

나는 구름 속을 걷는 듯, 뺨에 스치는 미세한 안개의 촉촉하고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전망대 주위를 걷는다. 해발 1,500m, 유럽에서 가장 높은 피오르드가 아닌, 그냥  높디높은 안개 속,  사박사박 촉촉한 물기를 걷는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아마도 이럴까?  


금세 다시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쉰다. 이 청량한 탄산수 같은 맑은 공기를 내  몸속에 최대한 저장하고 싶다. 차가운 냉기가 한꺼번에 몸으로 쏟아 들어오자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나는  듯했고 나는 한번 더 이 깨끗한 공기를  들이쉬곤 버스에 탔다. 



달스니바 전망대를 돌고 이제 버스는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창 밖에 아직  얼어붙은 빙하들을 바라보며, 빙하들 사이에서 힘을 내어 차디찬 물줄기를 뿜어내는 폭포를 바라보며 8월의 크리스마스를 체감한다. 

그런 사이 버스는 다시 정차하고 버스 기사는 “트롤스티겐입니다! 여기선 5분입니다!”라며 소리친다. 트롤스티겐, 트롤의 사다리 혹은 요정의 길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장소, 하나 여기 역시 딱히 눈에 보이는 건 없다. 


“오늘은 트롤이 어디론가 숨었나 보네!” 

그래도 아까보단 간간이 구름이 걷혀 사람들은 모두 난간에 서서 아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풍경을 바라본다. 그렇게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여행이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트롤이 아니라 동양의 신선이 숨어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안개의 산. 나는 구름을 타고 안개 속을 헤치며 전설 속의 도인을 찾아 짧지만 강렬한 모험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다. 버스는 이제 온 달스 네스로 달린다. 오늘 하루의 끝으로 바퀴가 굴러간다.      


온달스네스에 내리고 함께 온 자매와 인사를 나눴다. 그녀들은 내가 타는 기차보다 1시간 늦은 기차를 탄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여행의 행운을 빌며 그렇게 헤어졌다. 내가 탄 기차는 앞으로 약 6시간을 달려 오슬로로 간다. 


노르웨이에서의 날들이 끝으로 다가간다. 여행을 하면 하루가 길고, 시간을 길게 보낼 수 있다더니 그 이론은 노르웨이에선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참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노르웨이에서의 날들이었다.  


처음 계획을 세우고 오슬로 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혼자 어떻게 산행을 하고 어떻게 그 많은 이동을 할지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기우였다는 걸, 프레이케스톨렌의 정상에 서서 나는 스스로를 아니 지난 과거 속의 나를 향해 크게 웃었다. 


오슬로를 향해가는 기차 안 창 밖은 정말  오랜만에 손끝에 닿는 햇빛이 비춘다. 아니 이제 밤을 향해가는 해의 머리칼이 스쳤다고나 할 정도의 여린 햇살이지만 그 따스함이 창문 안까지 들어오는 것 같다. 


언제나 그랬다. 나라들은, 도시들은, 마지막 날엔 꼭 눈부신 석양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나를 잊지 말란 그런 진부한 옛 이야기 속 연인처럼 말이다. 울지 않고 웃어서 더욱 아프고 아련하다. 차라리 울었다면 피부를 물로 씻어내어 눈물자욱을 지워낼 텐데. 웃어서, 그래서 더욱 빛나서 더 잊히지 않는 연인의 얼굴처럼 눈부신 석양은 언제나 그런 강렬한 마지막 인상을 남긴다.  




언제쯤 나는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노르웨이의 나날들은 너무나도 아쉬움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이 곳에선 살면서 처음으로 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자연 속에 좀 더 오래 완벽한 일체를 결국 이루지 못하고 손 한번, 발 한번, 건드리고 떠나는 것만 같다. 


좀 더 오래 뺨을 맞대고 싶다. 

좀 더 오래 발바닥을 짓누르고 싶다. 

좀 더 오래 숨 쉬고 싶다. 


깊이, 더욱 깊이. 뭔가 요정에 홀린 듯 숲 속에서 한 여름 밤의 꿈을 꾸기라도 한 것 같다. 

이제 오슬로에서의 단 하루가 남았다. 


이제 한 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해야겠다. 

너무 슬프지않게,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하고 여운 남는 이별이 될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보랏빛 밤의 도시, 헬레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