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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운 고작가 Jun 29. 2020

소녀와 가로등

15살 소녀는 멀어져 가는 오빠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급히 뛰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덧 점이 되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집 앞에 외로이 서있는 가로등뿐... 소녀는 노랗고 반짝이는 불빛을 벗 삼아 오빠가 지나간 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허나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눈물 때문에 그마저도 흐릿해 보였다.


그날 밤, 소녀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떠난 오빠를 보고파하고, 그리워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나 지었다. 제목은 <소녀와 가로등>.


이 곡은 1977년 서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소녀에게 곡을 선물 받은 신인 여가수, 진미령은 이 무대를 통해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_K-VbkIUI

1977년 서울 가요제,  당시 신인이었던 진미령이 장덕의 곡 <소녀와 가로등>을 열창하고 있다.


장덕은 1980년대 활동했던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요즘 활동하는 가수와 비교를 한다면 아이유가 적당할 것 같은데 아이유처럼 큰 눈을 가졌고, 예쁘고, 히트곡 제조기인 데다 연기에까지 재능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실력을 인정받고 큰 인기까지 얻었으니 부러울 게 있겠냐만은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아픔이 있었다.


이혼이 흔치 않던 1970년대 당시, 부모의 헤어짐으로 단 하나뿐인 오빠와 떨어져 살게 된 것이다. 오빠는 이따금씩 장덕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야간 통행금지 때문에 밤늦은 시간이 되면 서둘러 여동생을 떠나야만 했다. 장덕이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노래가 바로 <소녀와 가로등>이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 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창밖에 가로등 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밖 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15살 소녀가 쓴 가사가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애절하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더욱 가슴이 아픈 건 우리는 장덕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재는 신의 미움을 받아 단명한다’는 말이 있듯 장덕은 1990년,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미 몇 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가 그리워 쫓아간 것일까? 장덕의 사망 원인을 두고 자살이다, 사고다 아직도 말이 많지만, 하나 정확한 거는 30년이 흐른 지금도 많은 이들이 장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와 가로등>은 이선희, 변진섭, 조관우부터 요즘 활발히 활동 중인 홍진영, 어쿠스틱 콜라보까지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대중가요 역사 속에서 여전히 명곡으로 추앙받고 있다.


오빠가 떠난 자리,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거리를 비추었듯 장덕이 떠난 지금 <소녀와 가로등>이 그녀를 대신해 세상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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