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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6. 2023

크로바레코드 8

8. 지구에 있는 감기약-H

     

어떻게 그 골목을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크로바 레코드 앞에 정신을 놓고 왔는지 현관 비밀번호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귀신 보는 날이냐? 얜 또 왜 이래?”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누나가 흔들어 깨운다.

“누나, 이거 번호가 뭐지?”

“뭬야? 십 년이 넘게 쓴 비밀번호도 기억이 안 나냐?”

누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마를 짚는다. 

“유행성 감기라도 도냐? 이놈도 펄펄 끓네.” 

누나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오래 밖에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나가 부랴부랴 감기약을 챙겨줬지만 먹지 않았다. 누나, 지구에 있는 감기약을 다 쏟아 넣어도 소용이 없어. 쿠션을 끌어안고 어둠이 고인 소파에 앉는다. 


“뭐냐. 이거 내 선물이냐?”

누나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인 봉투를 열어본다. 아까 서점에서 산 집게 핀이다.

“오, 마침 쓰던 거 부러졌는데.”

그러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던진다. 

“제이가 준 거야. 어디 옷가게에서 얻어 왔다더라.”

“제이…”

발목에 찍힌 스펠링이 이상한 양말이지만 그조차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분명 내 머리일 테니. 양말을 고이 안고 눕는다

“너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는데?”

누나여, 오늘은 아무 말이나 해도 화내지 않겠소. 모든 소리가 다 천국에서 들리는 것 같으니까     


그녀가 서 있던 서가에 선다. 초록 잎을 매단 벚나무가 싱그럽게 느껴진다. 하아, 입김을 내어 이름을 적어본다. J. 내 입김이 닿는 곳에 희미하게 다른 글자도 나타난다. H. 내 심장에는 방화범이 있어서 걸핏하면 불을 붙인다. 화악하고 뿌린 시너가 심장을 태우고, 얼굴을 물들인다.

“야한 생각이라도 하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는데?”

급소를 맞은 매직이가 엎드려서 낑낑댄다. 떨어진 책을 주워 꽂는다. 내가 그렇게 야릇하게 웃었나. 순수의 결정체인 내가? 

“무슨 일인데, 그리 실실 쪼개냐? 좋은 건 공유해야지?”

고통을 수습하고 쫄래쫄래 쫓아온 매직이가 새똥처럼 들러붙는다. 제발 아무 것도 묻지마라. 그러잖아도 방화범 때문에 미치겠구만,

“하니 사서 좋은 일 있나 봐?” 

며칠 새 얼굴이 핀 유나 사서님이 끼어든다. 이 분은 요즘 아동실 보다 종합자료실에 더 오래 있는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이를 만나는 일을 빼면, 앗, 또 방화범이 시너를 집어 든다! 

“어머, 얼굴 빨개지는 것 봐. 이글이글 탄다 야”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니 좀 정신이 든다. 무심함의 대명사였던 내가! 어쩌다 이런 부끄럼쟁이가 되었어! 


“이거 니가 쏘는 거다?”

시원하게 끓는 대구탕을 뒤적이며 매직이가 못을 박는다. 안나에게 널 버린 죄가 크니, 응당 그래야겠지.

“너 앞으로 나 몰래 안나 부르면 죽을 줄 알아.”  

“워워, 내가 오라고 했겠냐? 어디냐고 해서. 가게 상호를 알려준 것 뿐이야.”

“나랑 있을 땐 걔 전화 받지도 마.”

“누가 보면 질투하는 줄 알겠네.”

가위를 들고 지긋이 노려본다. 손에 든 모든 게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알았다. 알았어!”

국자로 가운데 토막을 푹 떠가면서 매직이가 고개를 주억인다. 녀석도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다. 안나를 달래느라 어제 진탕 마셨는지, 안색이 파리하다. 

“도서관도 알려주지 마.”

“야!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아! 아주 달달 볶더라.”

그랬겠지. 막무가내로 매직이를 괴롭혔을 거다. 꼬리 부분을 건져서 앞접시에 담았다. 국물이 칼칼하니 해장 좀 되겠네. 

“그래서?”

“말 안 했어! 근데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당장 인터넷을 뒤져봐도 네 이름 뜨잖아.”

“동명이인이 있어서 바로 찾진 못할걸?”

“그래서, 어느 구인지만 알려달라고 했나?”

“너!”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억울해하는 매직이를 위해 공깃밥을 추가했다. 모진 고문을 받았을 텐데, 잘 견뎌줘서 고맙다. 이건 내 마음이다. 

“그렇게 널 좋아하는데, 어쩜 그리 매정하냐. 나라면 한 번쯤은 넘어가 주겠다.”

“그런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야.”

“근데?”

“근데 그게 안 돼.”

“왜? 저 정도면 이쁜 편이잖아. 화장이 과해서 그렇지.”

큼직한 두부를 작게 잘라서 식힌다. 그대로 삼켰다가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내 심장에 불을 붙일 것 같으니깐.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목소리야.”

“그게 뭔 개소리야?”

너무 푹 익힌 시금치를 젓가락으로 깨작인다. 오늘은 반찬이 별로네. 어묵 볶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전에 왔을 땐 계란말이도 줬었는데. 초심을 잃으신 건가요. 

“난, 차라리 걔가 벙어리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정도로 목소리가 싫은 거냐?”

“넌 괜찮아?”

“조금 하이톤이긴 하지만, 이상할 정도는 아니야. 그냥 어린 애 같달까.”

“아무래도 내 귀가 예민한가 보다.”

매직이가 가슴을 쥐어 잡는다. 역시 두부를 식히지 않고 그냥 삼키셨구만. 자, 여기 물.

“넌 어떻게 들리는 데?”

“못으로 철판을 긁는 소리, 빈집 마당에서 들리는 칼 가는 소리, 녹슨 그네가 어스름 속에서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한밤의 비명소리.”

국물을 떠먹던 매직이의 입이 떡 벌어진다. 

“네 귀엔 정말로 그렇게 들린단 말이야? 좀 찡얼대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래.”


같은 소리라도, 듣는 귀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누군가에겐 그녀의 목소리도 앳된 소녀의 투정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내겐 아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호감이 있었다. 나름 귀여운 얼굴이었고, 서글서글하게 웃어서 좋았다. 그녀가 입술을 여는 순간, 반짝이던 유리가 파편이 되어 내 귀에 꽂혔다. 고요 속에서 자라난 나는, 그 파편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내 귀는 너무 예민하고 섬세하다. 

“제이의 목소리는? 안 그래?”

숟가락이 멈췄다. 제이…그녀의 목소리는, 막 구운 빵처럼 따뜻하지. 막 나온 이불 속 같기도 하고, 여름 물살에 흔들리는 반짝이는 지느러미 같기도 하고, 거품이 몽실몽실한 코코아 같기도 하고, 아, 생각만해도 따뜻해.

“표정만 봐도 알겠다.”

아니, 넌 모를 걸. 말하는 목소리랑 노래하는 목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말할 땐 더 조곤조곤하고, 더 속삭이는 것 같고, 더 사랑스러운 것도 모를걸. 꼭 끌어 안아주고 싶은 목소리인 것도 모를걸. 


“그만 좀, 히죽거리고 계산해. 기다리시잖아.”

아, 카드를 든 채 멍 때리고 있었네. 죄송합니다. 

“너, 오늘 왜 이러냐? 책도 이상한 데 꽂아놓고, 화장실도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고, 태수 사서가 여덟 번을 불렀는데도 몰랐다며.”

그게 당연한 지도. 어젯밤에 만난 그녀에게 내 온전한 정신을 맡겨두고 말았거든. 하이드  씨 거긴 따뜻하고 좋은가요. 이곳도 어수선한 분홍빛이긴 합니다만,

“너도 양말 받았냐?”

“너도?”

매직이가 발목 부근의 양말 로고를 당당하게 보여준다. 

“스펠링이 틀린 거 말고는 멀쩡해.” 

응? 내 눈엔 다 멀쩡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게 틀린 걸 수도 있어.

“감사의 마음도 전할 겸.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오늘 들릴까?”

매직이가 공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저는 시원한 사이다 부탁드려요. 방화범이 지른 불 좀 끌게요. 

“아니.”

“왜?”

나무들이 이렇게 싱그럽고 예뻤나. 장미봉우리가 이렇게 사랑스러웠나. 썬캡을 쓰고 운동하는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활기찼나. 구름도, 현수막도, 공기도 다 찬란하고 아름답다. 

“밥 먹어야 하거든.”

“밥? 누구랑?”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시너를 든 방화범이 씩 웃는다. 지금은, 부디, 참아주세요. 


아깐 없던 주름이 보이네. 집에서 갈아입고 갈까? 어, 이건 언제 튀긴 거지? 아까 먹은 탕 국물이 튀겼나 보다.

“하니 사서, 오늘 누구 만나? 오늘따라 거울을 수천 번 본다.”

선배도 아시잖아요. 저쪽 서가에 숨어있던, 복숭아빛 그녀를 만나러 가요. 헤헷.

“옷도 꽤 신경 썼는데? 소개팅?”

그냥 웃어 보였다. 설레임이 전해졌는지 선배도 싱긋 웃는다.

“좋을 때다.”

마지막 책을 정리하고, 매직이를 기다린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매직이는 요즘 연애도 끊고, 피치를 올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꼬시면 나온다. 이 녀석이 근로장학생을 시작한 후로 나도 번번이 끌려나갔다. 이젠, 친구도 끊어. 


“약속에 안 늦겠어?”

“응.” 

“나 빼고 만나는 사람이 대체 누군데? 내가 모르는 네 친구도 있던가?”

“아니 없을걸.”

이쪽에서 통 말해 줄 기미가 없자. 매직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눈이 반짝이다 사그러 들고, 반짝이다 사그러드는 것이 열일 중이로구나.

“참, 준이 형한테 연락 왔었는데.”

“준이 형?”

오늘따라 왜 이리 신호가 기냐. 깜빡대는 불빛처럼 내 마음도 초조해진다.

“벌써 잊었어? 몽이 누나랑 동창이잖아. 우리 옆집에 살던 키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그 형.”

아, 그 형. 기억난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온 동네 소녀들의 마음을 심난하게 했었지.

“유학 갔다고 안 했어?”

“아, 귀국했나 봐. 조만간 보자더라.”

“그래.”

준이 형은 미대를 나와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봄봄 화실에 다닐 적에는 형 덕에 화실이 엄청 붐볐었다. 달콤해 보이는 카라멜 색 피부에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었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림까지 잘 그려서, 그림보다는 형을 보러오는 여학생이 더 많았단다. 봄봄의 전성기였다고나 할까.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집에 들렀다 가게?”

“뭐.”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란히 걸었다. 준이 형 얘기로 차분해졌던 심장이 골목 어귀를 들어서자 탈출극을 시도한다. 어디 심장용 목줄 안 파나요. 

크로바 레코드 앞에서 서성대는 봄빛이 보인다. 라일락 빛깔 원피스가 바람에 흔들린다. 나와 있었구나. 매직이가 곁에서 뭐라고 했지만 듣지 못했다. 

늦장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더는 짝사랑으로 끝내지 않을 거다. 그녀가 오지 않은 도서관은 텅 빈 것처럼 아프고 고요했다. 내가 사랑한 백색 소음 속 고요가 아닌, 폐가에서 느껴지는 생기 없는 고요. 더는 그런 고요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희고 말랑한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좋았다. 심장이 맞닿은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어버버버 서 있는 매직이를 뒤로 하고 골목을 달려 나왔다. 봄밤은 두근댄다. 봄밤은 속삭인다. 봄밤은 사랑한다. 


큰길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섰다. 숨이 차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온 그녀가 가뿐 숨을 뱉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희고 둥근 카라가 달린 옷은 그녀에겐 너무 귀엽다. 가뜩이나 귀여워 죽겠는데. 그리고 작고 낮은 목소리

“우리 왜 도망친 거에요?”

“안 그러면 따라올 것 같아서.”

“누가요?”

“망설임이.”

동그란 눈이 활처럼 휘어지며 웃는다. 마주 보고 나도 웃었다. 난 간질이는 게 봄밤 인지, 그녀인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수만 가지의 일이 있지만, 이 밤을 놓치고 싶지는 않다. 여름이 되면 우린 어디론가 숨어들 테니까. 

“우리 오늘 소풍 가요.”


역을 지나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를 지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 다리에 왔다. 다리 밑으로 맑은 물이 흘러간다. 예전엔 온갖 것들이 떠내려오는 하천이었는데, 지금은 잉어떼가 놀고, 새들이 서식하는 깨끗한 강이 되었다. 

“이런 데가 있었네요.”

“어릴 때 우리들의 아지트였어요.”

매직이와 나 그리고 동네 꼬맹이들의 아지트였다. 집에서 좀 멀긴 해도, 학교에서 가까워서 하교 후엔 늘 이곳에 모였다. 뽑기 장사가 천막을 치고 장사를 했고, 병아리를 파는 아주머니도 오고, 솜사탕 아저씨도 왔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이 돼서 잡상인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남아있는 게 있다. 

“우리 저거 타봐요.”

그녀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건너편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막 천막을 걷으려던 할아버지가 여, 하고 아는 체를 한다. 

“오랜만이구나.”

“두 사람이요!” 


그 시절 우리를 하늘 높이 떠오르게 했던 방방이, 발을 구를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뒤집히고, 답답했던 마음도 뒤집혔다. 신발을 벗고 먼저 올라선다. 망설이던 그녀도 손을 잡고 올라온다. 처음엔 살살, 그리고 세상을 튕겨내듯 세게! 균형을 잡고 버티던 그녀가 드디어 넘어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잠시 누워있더니 금세 일어선다. 치마가 뒤집히는 것도 모르고 그녀가 둥실둥실 떠오른다. 춘향이를 보는 이몽룡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이건 뭐,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게 어여쁘다. 오오, 텀블링까지 가능하다니! 그러다 둘 다 넘어졌다. 눈이 마주 친 탓이야. 반동으로 통통 튕겨지면서 깔깔깔 웃는다. 후라이팬 위에 팝콘처럼 유쾌하고 즐겁다. 

“신나요!”

“나만큼?”

“네!”

다시 두 손을 맞잡고 통통, 하늘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지상이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우리도 그렇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라일락 빛깔의 원피스도, 내 흰 셔츠도 조금은 더러워졌지만, 괜찮다. 우리들의 마음은 한 톤 밝아졌으니까. 


“혹시 몰라, 늦도록 남아 있었더니, 하니가 왔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이번 주면 여기도 문을 닫거든.”

늘 쓰고 있던 국방색 모자를 벗으며 할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인다. 어릴 적부터 그 모습 그대로 별로 늙지도 않았다. 그게 늘 신기했는데, 오늘 보니 더 작아지시고, 너 쭈그러든 느낌이다. 그만큼 내가 자란 것일까. 

“왜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건강 때문이 아니고, 이쪽도 내년부터 공원으로 조성되나 보더라고. 그래서 퇴거명령이 떨어졌지.”

“아, 어릴 적 추억인데. 아쉽다.”

개발 속도에 맞춰서 우리들의 추억들도 사라진다. 병아리를 팔던 아주머니도, 솜사탕 아저씨도 그 속도로 사라져갔다. 

 “이참에 고향에 내려가려고 한다. 어디 다리 밑에서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잘 찾아와보라.”

“찾는 건 제 전문이거든요. 꼭 갈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공연히 그녀의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마지막이라서 공짜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천 원짜리 두 장을 꼭꼭 점퍼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공짜면 정말 마지막 같아서 싫단 말이에요. 


강변을 거닌다. 물소리를 음악 삼아, 아무 말 없이 걷는다. 가로등 불빛에 모든 게 바란 빛으로 보인다. 봄맞이로 심은 아기자기한 꽃들도, 운동기구들도 모두 따뜻한 노란 빛이다. 

“‘둥지’에서 봤을 때, 놀랐어요.”

“아,”

그녀가 얼굴을 붉힌다. 풋사과가 익을 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친구 부탁으로 간 건데.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니요. 목소리가요.”

동그란 눈이 살짝 커진다.

“너무 따뜻하고 예쁜 목소리라.”

꽃으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차마 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조차 미치게 사랑스럽다. 


치맛자락을 흔드는 바람이 셔츠를 붕 띄우는 바람이 나를 웃게 한다. 가로등 빛 속에서 그녀도 따뜻한 노란 빛이다. 나도 이렇게 따뜻한 빛깔일까. 

“도서관도 좋지만, 곁에 있는 게 더 좋아요.”

대답 대신 부끄러운 고개를 끄덕.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좋은 목소리. 아껴먹는 사탕처럼.

다리 근처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샀다. 벤치에 앉아 따뜻한 버거를 먹는다. 늦은 저녁이라 더 맛있다. 그녀도 맛있게, 앙, 베어먹는다. 

“밤 소풍도 좋네요.”

“다음에 또 와요.”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계속 같이 와요. 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변하는 이곳에 꼭 같이 와요. 비오는 날에 다리 밑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도, 눈 오는 날에 꼬마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치킨을 먹는 것도 다 좋아요. 여기라면, 당신이라면. 


크로바 레코드 앞에서 손을 놓았다. 온기를 놓친 손이 빈 둥지처럼 허전하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며 생긋 웃는다. 들릴 듯 말 듯 ‘또 봐요’ 

매직이가 맥주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이 자식아, 너땜에 알콜중독 되겠어. 오징어를 굽던 누나도 합석한다. 이거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어떻게 된 일이냐?”

“뭐가?”

“제이가 그 제이인 줄 언제 안 거야?”

“그 제이는 뭐냐?”

누나가 끼어든다.

“하니가 이 년 넘게 짝사랑하던 여자요. 걔가 제이에요.”

“걔가 제이라고!”

“그렇다니까요. 사서도 그래서 된 거잖아요. 그녀가 있는 도서관에 사서가 되고 싶다면서.”

누나가 먹던 맥주를 뿜는다. 에이, 더러버라.

“학창시절엔 실내화 갈아신 듯 여자애들을 갈아치우더니, 언제부터 이렇게 지고지순해지셨대?”

누나여. 소년 시절의 비행을 아직도 거들먹거리시는가. 그땐 사랑이고 뭐고 몰랐어. 괜찮으면 사귀고, 싫증 나면 헤어지고, 뭐 그랬지. 스낵처럼. 

“이년 내내 망부석처럼 쳐다만 보더니, 아깐 손을 잡고 달아나더라니깐요!”

손을 잡던 그 순간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젠장,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아주, 좋아죽겠구나.”

흠흠, 헛기침을 해봐도 소용없다. 차라리 당당하게 맞서자. 과정은 찌질했지만, 결과가 뭐 창대하니까. 

“2단계고 자시고, 밥부터 먹으라며. 그래서 밥 먹었어.”  

“진도 이상하게 뺀다. 사칙연산 배우다가 갑자기 2차 방정식으로 넘어가네?”

“너도 밍기적대지 말고, 바로 2차 방정식으로 넘어가.” 

심문을 하던 매직이가 말문이 막힌다. 너를 장시간 지켜본 나도 동치미 국물 없이 고구마 먹는 기분이거든. 이미 찢은 오징어를 누나가 더 갈기갈기 찢고 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이 형한테 물어보고,”

“뭐, 뭘?”

“뭐긴 공무원 공부지? 요즘 잘 되고 있지?”

“그야, 그렇지.”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리며 매직이가 누나를 힐끔댄다. 누나의 볼이 발그레 한 건 분명 취기 때문은 아닐 거다. 이 답답한 인간들! 


“참, 다리 밑에 방방이 이번 주가 마지막이래.”

“왜!”

오징어를 찢던 누나가 튀어 오른다.

“그쪽도 개발되나 봐.”

“타러 가야겠네. 내일 갈까?”

“난 내일 바빠. 매직이랑 가.”

“기왕이면 같이 타야지. 너도 탄 지 오래 됐잖아.”

둘이 가는 게 더 좋으면서 매직이가 빈말을 시전한다. 

“난 오늘 제이랑 탔거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칭찬 감사합니다. 이 년 동안 구르는 연습만 했거든요. 이제야 성공했네요. 

“그나저나 그 제이가 그 제이인 게 신기하다.”

“나도.”

그토록 꿈꾸던 그녀가 그녀라는 게 신기해. 

“넷이 같이 언제 한잔할까?”

“좋아.”

아니, 난 아직 안 좋아. 조금 더 단둘이 있고 싶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좋은 제이를 지금은 독차지 하고 싶으니까. 


술은 줄고, 밤은 깊어간다. 불쑥 일어섰다.

“어디가?”

“자러.”

“야! 손님이 왔는데, 잠이 오냐?”

응, 와. 솔솔 와. 그리고 내가 있으면, 너와 누난 영영 발전하지 못할 것 같아. 

“누나가 불렀으니까, 누나가 좀 놀아줘. 매직이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대. 고민도 많고.”

“무슨 고민?”

누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매직이를 바라본다. 이때다. 둘을 남겨두고는 방으로 내뺐다. 


부디 매직이와 몽이도 잘되길 빌어요. 저만 행복하면, 저 둘이 시기할 것 같거든요. 반쪽짜리 달님에게 소원을 빌고, 크로바 레코드를 내려다본다. 그녀도 이렇게 웃음이 새어 나올까. 그녀도 이렇게 잠을 설칠까. 다시 느끼고 싶다. 그 목소리와 그 침묵, 그리고 한 손에 쏙 들어오던 말랑한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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