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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May 26. 2023

크로바레코드 7

7. 지구에 있는 감기약-J

   

사장 언니가 발품을 팔아 떼온 옷에 태그를 박는다. 옷감이 상하지 않게 솔기 안쪽에 잘 쏘고, 도난방지 벨도 신중히 단다. 청바지나 값이 좀 나가는 외투류엔 도난방지 스티커까지 숨겨 둔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도난방지 벨이 울려댄다. 이쪽의 실수도 있지만, 정말 도둑도 있다. 도둑은 일단 도망부터 친다. 그럼 달려가서 잡아 와야 한다. 놓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잡는다. 전에 옆 건물로 도망친 도둑을 잡은 적이 있다. 평범한 아주머니였는데, 왜 도망치셨어요? 하고 묻자, 놀래서 그랬다고 했다. 가방 좀 보여주세요. 순순히 핸드백을 열었는데, 가게에서 훔친 악세사리가 나왔다. 

“오히려 얌전해 보이는 어르신들이 더 많아.”

“가난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정말 없어서 훔치는 사람. 요즘 없어.”

돗자리를 깔고 앉아 라벨을 붙인다. 금속제품들은 변색되지 않게 opp봉투로 포장한다. 1층은 악세사리와 신발 잡화 등을 팔고, 2층은 옷을 판다. 품목이 많은 만큼 가격을 붙이는 방법도 포장을 하는 방법도 다르다. 아침 아홉 시부터 12시까지 청소 및 진열을 하고, 12시 이후에 개점이다. 


처음 여기서 일했을 땐, 입구에 있는 속옷코너에서 속옷을 정리하고, 벨이 울리면 튀어나가 도둑을 잡았다. 속옷보단 도둑잡기 알바를 한 것 같다. 처음엔 아무 벨이나 울려도 긴장해서 튀어나갔는데, 나중엔 한결 여유가 생겨서 귀신같이 도둑을 잡았다. 인파 속에 묻혀도 수상쩍은 모습은 어쩐지 티가 난다. 

“너 참, 도둑 잘 잡았는데.”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용케 잘 견뎠네.”

“그것 빼곤 좋은 알바였어요. 재고 정리할 땐 옷도 주시고, 밥값도 따로 주시고.”

“사장 앞이라고, 아부가 심한데?”

그래야 또 불러주시죠. 가격을 붙이다 말고, 불량을 발견해서 따로 빼놓았다. 민트 색깔 니트인데 올이 풀렸다. 

“다음 달에 재고 정리하는데, 알바하러 와라.”

“불러만 주세요.”

가끔 손이 모자랄 때 전화가 온다. 이 일 저 일 맡겨도 될 만큼 이곳에선 오래 일했다. 

“양말 필요하면 좀 가져가. 저쪽 창고에 있어.”

“팔 거 주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살짝 하자가 있어서 반품해야 하는데. 거래처가 망했잖아. 팔 수도 없고. 아까워 죽겠어.” 

덕분에 얻어갑니다. 삼총사 몫까지 챙겨갈게요. 사장님. 복 받으실 거에요. 


다행히 오늘은 2층을 맡았다. 손님들이 흩어놓은 옷을 다시 개고, 떨어진 태그를 붙이고, 재고 문의가 들어오면 창고에 가서 찾아온다. 3시간에 한 번 30분씩 쉰다. 2층 사무실에 직원들 쉼터가 있다. 간단한 간식이랑 음료가 구비되어 있어, 복지 또한 나쁘지 않다. 

“저, 이거 28 사이즈도 있나요?”

바지 코너에서 서성이던 여학생이 다가온다. 

“잠시만요.”

다른 손님이 엉뚱한 곳에 걸어둔 바지를 찾아 학생에게 건넸다. 여학생이 바지를 들고 탈의실로 향한다. 이참에 바지 정리를 해야겠다. 디자인 별로, 사이즈 별로 다시 정리한다. 

“그만 가. 시간 오버 됐다.”

카운터를 비워두고 올라왔는지 사장 언니가 서두른다. 네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양말 봉지를 들고 개운한 마음으로 퇴근했다. 오늘은 꼭 순대 볶음을 먹고 가야지.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던 거다. 단골이었던 순대곱창집에 들러서 2인분을 시켰다. 일행은 없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만큼 먹을 거니까.

통통한 순대와 쫄깃한 곱창, 쫀득하게 불은 당면, 누른 떡, 향기로운 깻단아, 수고했어. 당당하게 2인분을 먹고, 밥까지 볶았다. 저 오늘 탈선할거라니까요. 산처럼 쌓여있던 순대가 사라질 때마다 마음속에 쌓여있던 스트레스도 조금씩 줄어든다. 그렇게 곰 씨를 대하고 나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누구나 사정이 있는 법인데, 내 기분만 생각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인데, 헤아리지 못했다. 가장 큰 실수는 마음을 드러낸 것. 어째서 엄마에겐 내비치지 않던 마음을 그에겐 보였을까. 생각할수록 낯이 뜨거워진다. 미역냉국을 호로록 마셨다. 아, 정말 배가 터질 것 같다. 박하사탕을 양 볼에 물고 가게를 나왔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받지 않았다.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하지 않다. 정 필요한 게 있으면 문자로 할 거다. 우린 여지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어금니로 바싹 박하사탕을 깨물었을 때 문자가 왔다.      


‘모두 내 잘못이다. 곰을 못 오게 한 것도, 다 내가 한 짓이야. 그렇게 숨기면 다치지 않을 줄 알았어. 미안하다.’   

  

난 이대로가 좋다. 한발 다가가는 것도, 한발 다가오는 것도 다 싫다. 지금의 관계가 무너지는 게 무엇보다 무섭다. 애초부터 잘못 설계된 집이라면, 건들지 않는 게 좋아요. 어딘가 손을 댔다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답장을 하지 않고, 걸었다. 허기 씨를 두고 와서 다행이다. 그까지 동행을 했다면 나쁜 짓을 했을 것 같다. 망한 가게에 돌을 던진다거나, 길가 쓰레기봉투를 걷어찬다거나, 좋아죽는 커플들 뒤에서 악다구니를 썼다거나. 워워, 허기 씨는 오늘 먼 길 떠나셨거든요. 양말 봉지를 휘휘 돌리며 기운차게 걷는다.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난다?”

몽이 언니다. 맨날 가게에서 보다가 밖에서 보니까 새롭다. 

“어디 가세요?”

“응, 약속이 있어서, 그 봉지는 뭐야?”

봉지를 펼쳐들고 활짝 웃었다. 역시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니깐

“언니, 골라봐요.”

“어, 양말이네. 어디서 났어?”

“아는 옷가게에서 얻어 왔어요. 하자가 좀 있긴 한데 별 티는 안 나요.”

“그럼, 동생 꺼랑 내 꺼 두 개만 골라갈게.”

들고 있는 가방에 고른 양말을 쏙 넣고는 언니가 버스를 타러 달려간다. 그럼 남은 인심을 탕진하러 가볼까. 


세탁소에 들려서도 인심, 슈퍼에서도 인심, 방앗간에서도 마구 인심을 썼다. 무거웠던 기분이 새털처럼 가벼워져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집에 가면 쓰다만 노래와 낡은 기타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조물조물 그 애들을 만지러 가야지. 아, 신난다.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올 때까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바람처럼 그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우리 밥 먹어요.”     

 

무슨 정신으로 집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눈앞에 그가 있었고, 얼굴이 뜨거워질 만큼 달아올랐다. 그도 나만큼. 

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웅얼거렸는데, 그가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웃는 건 처음 본다. 눈 밑에 생기는 보조개랑 고른 치아가 정말 예쁘구나. 달뜬 눈빛도 너무나 곱다.

“그럼, 내일, 여기서 만나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수줍게 웃고는 골목길을 달려간다. 그가 하니였구나. 내가 만에 하나 꿈꾸던 몽이 언니의 동생. 그리고 세탁소집 매직이의 친구. 설마, 설마, 하고 바라던 그가, 정말 그였어.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터질 것 같다. 만 가지도 들어주지 않던 소원을 이렇게 들어주시는 거에요? 저 이제부터 정말 착하게 살게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선하게 살게요. 그러니까 이 행복 뺏어 가시면 안 돼요. 오늘 일이 꿈이어도 안돼요. 


“왜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냐?”

몽이 언니가 툭, 치지 않았다면 거기서 밤을 세웠을 지도 모른다. 

“귀신이라도 봤냐? 너 상태가 이상한데? 얼굴이 왜 이리 빨게. 어머, 아주 불덩이네” 

겸연쩍게 웃고는 열쇠를 찾았다. 손이 덜덜 떨려서 문도 잘 열리지 않는다. 결국 언니가 열어줬다. 

“감기약 있으면, 먹고 얼릉 자라. 아무래도 열감기 같애.”

언니, 지구에 있는 감기약을 다 쏟아 넣어도 소용이 없을 거에요. 쿠션을 끌어안고는 멍하니 소파에 앉는다. 기타야, 미안, 노래야, 미안. 오늘은 내가 좀 미쳤나 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수줍게 웃는 그 얼굴과 눈가에 번지던 보조개 그리고 그 설레는 눈빛 밖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달달로맨스 #크로바레코드 #봄봄화실 #현로 #옛날가요 #추억의가요 #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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