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냐옹 Jun 02. 2023

크로바레코드19

19. 방울 소리-J

     

처음으로 라디오에 출연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꿀떡 찰떡 사랑떡’을 불렀고, 경연에서 불렀던 ‘벚꽃살랑도서관’도 불렀다. 말하는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고, 시청자와 같이 통화도 했던 것 같다. 근데 왜 다 꿈속 같지?


휘청휘청 나오는 나에게 누군가 인사했다. 아, 경연에서 봤던 PD다. 폐자부활전을 할 때, ‘꿀떡 찰떡 사랑떡’을 권해줬던 그 PD. 가느다란 금테 안경에 약간 개구쟁이처럼 생긴 이목구비가 기억에 남았다. 

“시간 있으면 잠깐 차 한잔해요.”

“이 시간에요?”

거의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데?

“여기선 초 저녁이죠. 요 앞에 24시간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마무리 하고 갈 테니까.”

뭐, 어차피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 건 매한가지니까. 좀 기다려보기로 할까. 30분쯤 지나서 그가 왔다. 생글거리며 다가오는데 환청처럼 작은 종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수면 부족인가.


“많이 기다렸죠? 아, 벌써 차를 다 마셔 버렸네. 잠깐만요.”

그가 따뜻한 우유랑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이 새벽에 그걸 마셔도 되는 겁니까? 내 몫으로 나온 우유를 홀짝인다. 아, 어색하네.

“마침, 코너 하나가 비었거든요. 본래, 소연 가수가 하던 건데, 프로그램이 개편되면서 없어졌어요. 제이 씨가 고정으로 그 프로에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요?”

“네, 시청자들의 사연에 맞춰서 노래를 불러주면 돼요. 사연도 제이 씨가 읽어주면 좋구요.”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 1인 방송 하고 계시죠? 그것처럼 하면 돼요. 제이 씨는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고, 딱 심야방송에 어울리는 보이스랄까.”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가 생긋 웃는다. 다시 그 종소리. 주변을 둘러봐도, 종 같은 건 달려 있지 않은데.

“닉네임. 방울방울. 그게 저에요.”

어, 우리 라디오 1호 청취자인데? 처음 라디오를 했을 때, 그 한 명이 있어서, 엄청 기운이 났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매일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주 들어와서 댓글 창을 풍성하게 해준다. 설마, 그 ‘방울방울’이 PD님이셨어?


“너 정말, 날 못 알아보는구나?”

엥?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찾았는데.”

날? 왜? 어떻게 알고?

“내가 그렇게 변했나? 아님, 네 기억 속에서 영영 지워졌나?”

다시 방울소리가 들려온다. 이 방울 소리. 육교에서 나던 그 방울소리. 그 방울을 가방에 달고 다니던 애가 있었어. 뽀얀 얼굴에, 생글거리는 눈. 그리고 귀여운 덧니. 그가 웃자, 덧니가 살짝 드러난다. 설마 너!


“케이?”

“영영 지운 건 아니네.”

입이 떡 벌어진다. 육교 위에서 그렇게 힘껏 날 밀었던 그 날의 케이가 생글거리며 웃는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네. 못 알아본 것도 당연해. 

“난 널 딱 알아봤는데,”

“미안,”

“미안한 건 나야. 널 육교에서 밀어버린 그 날부터 내내 미안했어.”

“시켜서 한 거잖아. 나라도, 밀었을 거야. 아마.”

그가 에스프레소 잔을 만지작거린다. 애초부터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구나. 그 대신 맥주를 두 병 시킨다. 

“넌 다 알고 있구나?”

“심증.”

서비스 안주와 함께 레몬을 띄운 병맥주가 나왔다.

“널 밀면, 누나를 살려준다고 했어. 그땐 왜 그 말을 믿었는지 모르겠어. 그건 하늘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 그걸 이용한 거야. 그 앤.”

“난, 네가 경찰에 말할 줄 알았어.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야? 나인 줄 알았잖아.”

“네가 늘 달고 다니던 종. 그건 부적 같은 거지?”

“응.”

“그 마음을 아니까. 부적에 온 마음을 담을 만큼 간절했던 걸 아니까. 그런 너라면, 재미 삼아 사람을 밀 것 같지 않았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었겠다 생각했어.”

“고작 초등학생이?”

“그래. 고작 초등학생이.”

레몬을 띄운 맥주가 상큼하다. 오랫동안 막힌 속이 뻥 뚫리는 느낌. 


“널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은 네 눈을 보고 싶었어. 누나가 세상에 남긴 건 그것뿐이니까.” 

그가 부끄러운 듯이, 머뭇댄다. 

“이 눈은 밝은 데서 봐야 해.”

그의 소매를 잡아끌고 카페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간다. 바로 위에서 조명이 쏟아지는 구석 진 자리. 햇빛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라도, 보일 거야. 그가 차츰 가까이 다가온다. 내 동공을 자세히 바라보던 그가 결국 운다. 허물어지듯 주저앉아서, 바보처럼 엉엉.


“똑같아. 어릴 적에 봤던, 누나의 눈동자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눈은 네 누나의 눈이야.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밝은 빛 속에서 바라본다. 그도 다시 마주 본다. 

“앞으론, 자주 보자.”

“그래도 돼?”

“내가 라디오에 고정으로 나가는 동안은 어쩔 수 없잖아.”

그제야 그가 웃는다.

“맞아.”

“니가 손 쓴 거지? 날 게스트로 하자고?”

“그래. 오늘 부른 건, 나의 강력 추천이 맞아. 하지만, 고정으로 추천된 건 내 힘이 아니야. 그건 너의 능력이지. 내가 그 정도로 빽이 좋은 건 아니거든.”

“흠, 역시 심증만 가고 물증이 없네.”

“이건 믿어주라.”

“뭐, 언젠간 밝혀지겠지.”

케이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참 신기하네. 어릴 적 친구를 만난다는 건. 그토록 세월이 지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혹시 술의 힘인가. 


“넌, 아직 안나를 만나는 거야?”

“뭐, 그렇다고 해야겠지.”

아직 연락처를 삭제하진 않았으니까. 

“대체 왜? 친구가 걔밖에 없던 것도 아니고.”

정말 왜일까? 그 애가 사준 떡볶이에 좋았던 것도, 그 애의 으리으리한 집이 좋았던 것도, 그 애의 집에 있던 귀여운 강아지가 좋았던 것도 아닌데. 

“나는, 안나에게 사과할 기회를 줬던 것 같아. 안나가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내내 기다렸어. 근데, 안나는 결코 그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이젠 정리를 할까 해.”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 그냥 폐기 처분해.”

“너도 참 과격하게 말하네.”

“그러게. 안나와 공범인 주제에.”

공범치고는 순수하고 바보 같던 소년이 이제는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참으로 요상하고 신기해.

“날 찾아 헤매다가 라디오에서 발견한 거야?”

“그래. 너라면 데뷔를 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음반이 나오질 않잖아. 그래서 인터넷의 바다를 샅샅이 뒤졌어. 노래자랑에서 입상도 하고, 어디 페스티벌에 나가기도 했더라. 그러다가 폐허 같은 SNS계정을 찾았는데, 1인 방송국을 한다는 거야. 그 길로 청취자가 됐어.”

“그래서 1호님이 되셨군요.”

“뭐, 그래서 1호가 되긴 했지만, 방송 자체도 좋았어. 특히 반창고 밴드가 나왔을 때. 진짜 음주 방송인데, 푸근하고 좋은 거야. 떠들썩하기도 하고. 꼭 나도 같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고. 막 친근하고.”

그 날 이후로 청취자들이 많이 늘었다. 지금은 댓글 창을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 

“오늘은 어떻게 하고 온 거야?”

“하루, 펑크지. 뭐, 공지를 하긴 했어.”

“네 라디오 대신, 우리 방송을 들었겠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덜 미안하지.”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마시다가, 동이 틀 때 쯤 크로바에 도착했다. 씻지도 않고, 이부자리에 눕는다. 어, 하니한테 문자가 이렇게 많이 와 있었네. 아, 정말 미안. 근데 나, 너무 졸리다. ♡ 하나만 날리고, 늪과 같은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크로바레코드 #빚대신로맨스 #쥐구멍에도볕뜨는로맨스 #버스킹 #하니와제이 #봄봄화실 #로고 #웹소설

작가의 이전글 크로바레코드 1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