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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Jun 03. 2023

크로바레코드 20

20. 자라지 않는 공주-매직

     

얼마나 떨었는지,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래도 정석대로 말한 것 같아, 안심이다. 부디 합격할 수 있기를. 잠깐 앉아서 기도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와, 날도 진짜 기차게 좋네. 몽이 누나네 네일샵이나 놀러 갈까? 아니면, 밀린 세탁물이나 배달 할까? 역까지 힘차게 걸어가는 데 전화가 울린다. 음, 안나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뚝 끊긴다. 대신 문자.


‘너까지 안 받는 거야? 잠깐이면 되니까. 역 앞에서 만나. 전에 봤던 데 있지?’

‘난 할 말 없는데?’

‘마지막이야. 더는 귀찮게 안 할게’


그렇다면야. 마지막 인정을 베풀지. 이참에 밥도 얻어먹어야겠다. 

굳이 돈까스집까지 와서, 주스 한 잔만 시키는 게 어딨냐. 혼자 먹는 내가 너무 돼지 같잖아. 안나는 고원지대에서 발견된 미라처럼 말라 있다. 냉정하게 먹은 마음이 자꾸 약해질 정도로. 


“아직 회복이 덜 된 거야?”

“아냐, 이제 다 나았어.”

안나가 잘 봉합된 손목을 보여준다. 좀 흉하긴 해도, 잘 붙었네. 

“나, 곧 유학갈 거야. 아빠도, 엄마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런 우울한 생각들도 안 할거래.”

“그래, 넌, 새로운 환경이 필요해.”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지 말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좋은 기회야. 스펙도 쌓을 수 있고, 새로운 인연도 만날 수 있고,”

“난, 그런 거 필요없어. 지금 이대로도 좋아.”

아니야. 절대 좋지 않아. 너에게도, 하니와 제이에게도 절대 좋지 않아. 

“안나, 영영 가는 게 아니잖아. 잠깐 떠나있는 것뿐이야. 분명 네게 좋은 계기가 될 거야.”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이 수두룩해. 제발, 이 기회를 잡아. 집착과 미련으로 너를 갉아먹지 말고.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어. 제이랑 하니한테.”

표정이 굳어진다. 결국 또 날 이용하려고 불러냈구나. 

“제이와 하니는 원하지 않을 거야.”

안나가 입술을 앙 다문다.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그 표정이 기어이 나오는 구나. 저 탐욕스럽고, 고집스런 표정이 나는 정말 싫다. 어릴 적부터 넌 그 표정으로 모든 걸 얻어냈겠지. 떼쟁이 공주님. 

“난, 제이에게 사과할 게 있어. 꼭 만나서 해야 해. 네가 그 말을 전해줘. 그럼 제이도 본다고 할 거야. 마지막이니까, 제발 부탁할게.”

“안나야…”

“제이와 하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해줘. 그럼, 미련 없이 떠날 거야. 약속해.” 

그래서 미련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또 내가 넘어가고 말았네. 하지만, 정말 마지막이야. 다신 네 전화 안 받을 거니까. 


안나를 보내고, 하니에게 전화를 한다. 아, 날도 좋고, 배도 부르고 식곤증이 몰려오네. 

“나 쉬는 거 어찌 알고 전화했냐?”

밖인가, 엄청 소란스럽네.

“그러는 너는, 나 면접 보는 거 알았냐?”

“어떻게 모르냐? 니 애인이 우리 집에 사는데?”

고맙다. 애인이라고 말해줘서. 갑자기 기운이 나네. 

“안나가 너 보고 싶대.”

“날, 왜!”

“유학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대. 그래야 떠날 수 있대.”

“떠나든 말든 난 상관없어. 그러니까 안 볼 거야.”

곁에 있었으면 맞아 죽었을 거야. 하니 정말로 화났네. 말투가 살벌해.

“제이 옆에 있어?”

“응.”

“그럼 전해줘. 안나가 제이에게 사과할 게 있대. 그래서 만나고 싶대. 난, 전할 말 다 전한 거다. 그러니까 나머진 니들이 알아서 해.”

하니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 하니가 곁에 있는 제이에게 말을 전한다. 제이의 따뜻한 목소리가 숱한 소음을 뚫고 들려온다. 

“알았어. 지금, 우린 뚝섬에 있거든. 카페 R 앞에서 보자고 해. 대로변 옆에 있으니까 금방 찾을 거야.”

“직접 전하지.”

“그럼, 번호가 찍히잖아.”

감추고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뭐, 일단 알았다. 마지막 소임을 다하지. 


그게 내 가장 큰 후회. 안나의 부탁을 모른 척 할 걸. 제이처럼 연락처를 바꾸고, 세탁소 뒷방에 숨어버릴걸. 그랬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제이도, 하니도, 그리고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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