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니시모어 여행 1

'이니셰린'에서 온 초대장

by missnow

'이니셰린'에서 온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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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너머는 전쟁 중임에도 '이니셰린'의 주민들은 여전히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섬의 모두가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과 서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니 그간 꾹꾹 쌓여왔던 너무나도 많은 이유들로 인해, 인생의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에게 절교 선언을 당하고 주인공의 일상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화 포스터 속 ‘인생의 친구가 오늘 절교를 선언했다’라는 카피와 절벽 배경에 끌려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 당시 인간관계로 고민이 많을 때라 영화 카피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던 걸지도...
인간관계만을 다루고 있는 영화는 아니라서 사실 영화의 메시지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니셰린’ 섬에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푸른 초원과 회색빛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바닷가 마을.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절벽으로 단절된 바다가 공존하는 버려진 요새 같은 곳.
영화는 내게 ‘이니셰린’에서 온 초대장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니 ‘이니셰린’은 아일랜드 ‘이니시모어’ 섬을 배경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날부터 ‘이니시모어’ 섬 여행은 내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원하는 만큼 주유하고 주유기 번호를 말하면 끝?!


반나절 골웨이 관광을 마치고 미리 예매해 둔 오후 6시 배를 타기 위해 출발했다. 이동거리가 길었다 보니 기름이 바닥이 나서 우선 주유소에 들렀다.
주유기에서 바로 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주유 후 주유기 번호를 말하고 결제를 하면 된다’라고 인터넷 검색에서는 나오는데, 사실 '원하는 만큼 주유'는 어떻게 하는 건가 가 잘 이해가 안 돼서 좀 걱정이 됐었다.

일단 주유소에 들어가서 주유건을 들고 주유를 했다. 금액이나 미터 단위를 미리 결정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주유하면 됐다. 말 그대로...
이걸 왜 미리 걱정했나 싶게 정말 말 그대로였다. (너무 쉬워서 주유하는 법을 알려주는 후기는 없었나 보다)
주유가 완료된 후 가게 안에 들어가 손짓으로 주유기를 가리킨 후 주유기 넘버를 말하고 카드를 내니 바로 결제를 해주었다. 가게 안은 편의점처럼 간단한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고 화장실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주유까지 클리어했으니 이제 더 이상 운전 관련해서 난관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골웨이를 떠났다.


로사빌 페리 터미널에서 이니시모어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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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로사빌 페리 터미널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매표소에서 미리 예매해 둔 표를 실제 티켓으로 교환했다. 이니시모어 섬에 가는 사람이 몇 명 없다고 생각했는데 출발 15분 전에 도착한 셔틀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금세 터미널이 북적북적해졌다.

마지막 배라 그런지 관광객들보다는 식료품 등 물건을 잔뜩 들고 있는 섬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배는 흔히 볼 수 있는 소형 여객선이었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친절한 직원분이 캐리어를 옮겨주셔서 편하게 짐을 실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코스가 아니라서 좀 걱정했는데 배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니 긴장이 풀려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Are you l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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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모어 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다.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것처럼 나만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거리에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펍인 The Bar밖에 없었다.

The Bar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늘 예약해 둔 B&B가 있다고 지도상에는 나오는데, 근처에 가봐도 B&B를 찾을 수 없어서 헤매고 있을 때 The Bar 정원에서 놀고 있던 꼬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Are you lost?”
키가 내 허리 언저리밖에 안 되는 꼬마가 내뱉은, 무엇이든 도와줄 것 같은 다정한 말투에 순간 그 주위가 밝고 따뜻해진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었을까. 더 이상 어둑어둑한 거리가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I'm OK.라고 대답한 후 아까 헤맸던 곳에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B&B가 나왔고 체크인 후 캐리어만 넣어두고 저녁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B&B에 오는 길에 있었던 가게들이 모두 문이 닫혀 있어서 예상을 하긴 했는데 마트까지 문이 닫혀 있었다...

이 근방에 이 마트 말고 다른 마트나 편의점은 없었다. 더 이상 가게를 찾아 헤매는 것이 무의미해서 B&B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불이 켜져 있던 The Bar가 생각났다.
이 시간,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건물.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왜인지 들어갈 용기가 났다. 아이가 있을 정도의 펍이라면 왠지 안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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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에 들어가니 어디론가 사라졌던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동네 주민 몇 명이 카운터에 앉아 럭비 경기를 보고 있었다. 아까의 그 꼬마와 형제인 듯한 아이가 부모를 도울 셈인지 행주를 들고 테이블 사이를 얼쩡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한적해 보이는 카운터석 뒤 테이블에 앉아 기네스를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가게를 둘러보니 각종 술과 잔이 진열장 옆에 don’t repeat gossip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주인공들이 매일 방문하는 동네 사랑방 같았던 펍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더블린이나 골웨이에서 펍이어서 못 들어갔던 게 아니라, 혼자 앉아 있기 어색한 그 분위기를 못 견뎌서 못 들어갔던 것 같다. 지금 여기 동양인 여자는, 아니 여기에 있는 동양인은 나 하나뿐 이지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피시 앤 칩스를 시키고 기네스가 아닌 라거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인생 최고의 기네스를 먹고 왔더니 이제 다른 기네스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밀린 다이어리를 정리했고, 그새 단체 손님들이 더 들어와 다소 한적했던 펍은 시끌벅적해졌다. 왼편에는 관광객 무리가, 그리고 내가 있는 오른편 카운터석에는 여전히 동네 주민 몇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구글 후기에 음식 맛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피시 앤 칩스는 맛이 괜찮았다. (두툼한 동태 전을 먹는 느낌이었다)
카운터 앞에 LIVE MUSIC TONIGHT 안내판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오른편 무대에서 튜닝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냥 맥주 한잔만 마시고 호다닥 돌아갔으면 이 펍의 정수를 놓칠 뻔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했던 미지의 장소였는데, 용기를 낸 덕분에 더블린, 골웨이에서도 체험하지 못한 아일랜드의 펍 문화를 체험했다.


이곳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더 즐기고 싶었지만 이 즐거움과 평화는 ‘안’에서만 한정된 것이고 여전히 밖은 어둠일 것이다. 분위기에 취해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취기가 돌기 전 다시 B&B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쫄보인 내가 이 정도까지 용기 낸 건 아까 그 꼬마 덕분이었다. 다 클 대로 커버린 어른에게 길을 잃었냐고 물어봐주는 상냥함과 따뜻함을 갖춘 꼬마의 장래가 몹시 기대가 됐다.

어쩌면 내가 다시 이니시모어 섬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 꼬마가 The Bar의 주인이 되어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