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링오브케리, 킬라니 여행

여행의 목적과 본질

by missnow

460km, 6시간 대장정의 시작


언젠가 모든 것을 멈춰버리고 싶어지는 시기가 오면 이니시모어 섬을 떠올리게 될 것임을 예감하며,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기 위해 이니시모어 섬을 떠났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킬케니로, 그전에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링오브케리를 따라 이동하며 이동 경로에 있는 소도시 중 한 곳을 들러볼 예정이다. 오늘 예상되는 이동 거리만 460km, 소요 시간은 6시간 정도였다. 동선이나 시간상으로는 링오브케리를 드라이브하고 킬라니나 켄메어 등에서 숙박하거나, 아니면 링오브케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킬케니로 가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링오브케리 드라이브도, 소도시 구경도, 그리고 가장 마음이 끌렸던 킬케니에서의 여행일정도 포기 못했던 나는 일정을 하루에 몰아 넣었다. 아주 멀리 떠나와 아일랜드에 도착했음에도 나는 떠남 자체가 여행의 목적인 사람처럼 어디론가 계속 떠나고 있었다.


아일랜드의 다채로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링오브케리

로사빌 항구에서 차를 타고 중간 경유지인 킬라니까지 오는 동안 양과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장지대, 울긋불긋 단풍이 물든 능선, 중세풍 건축물이 가득한 평원을 스쳐 지나왔다.

웅장하거나 멋지다기보다는 한없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라 ‘여기에 살면 평화롭겠다, 너무 평화로워서 가끔 지루할 것도 같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날씨가 바뀌는 아일랜드답게 맑았다가 비가 내렸다가 흐렸다가 하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이어졌다. 오히려 변화무쌍했기에 좋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지 않은 점이 좋았다.

이곳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나라가 많지 않은데 아일랜드는 살아보고 싶은 나라였다.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들에 차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 안에 킬케니에 도착해야 했기에 멈추지 않고 경유지인 킬라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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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도중 맑음과 흐림을 반복하던 날씨는 킬라니에 도착하자 화창하게 맑아졌다.

여정의 중간 지점이라 킬라니를 경유지로 정하긴 했지만, 날씨 때문이라도 킬라니에서 쉬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오는 동안 눈으로는 풍경을 즐겁게 감상하면서도 사실 머릿속엔 비워지지 않는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행하면서도 내내 내가 무감각한 상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략적인 동선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타국의 도시들을 하루 몇백 킬로나 이동해 가며 여행을 하는 ‘나’는 평소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아니었다.
여행을 하고 있는 건 분명 ‘내’가 맞는데, 마치 내가 아닌 제삼자의 여행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건 내가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이번 여행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떠나온 곳의 내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끔 내 심장이 안 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내 장기나 세포 하나하나마저 실제로는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마치 내 삶이 흑백영화가 되어버린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희로애락은 물론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반응마저 무감각해져 버렸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지난 6년 동안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달린 결과, 지치다 못해 탈진해 버린 탓이겠지만... 단순히 지쳤다, 번아웃이 왔다고 하기엔 뭔가 좀 달랐다.
영혼에 잔뜩 스크래치가 나고 잡음이 껴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감각한 ‘내’가 되었기에 겁 없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쩌면 무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이곳으로 떠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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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본질을 느끼게 해 준 킬라니


킬라니 역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눈길 닿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온 다른 도시들과 비슷하게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면서도 킬라니만의 색이 있었다.

밴드에 비유하자면 더블린이 메이저 무대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인디밴드라면, 골웨이는 지역에서 자리 잡은 유명 잼 밴드, 이니시모어는 과거의 영광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퇴역 밴드, 그리고 킬라니는 연륜 있고 여유 넘치는 중년 밴드 느낌이다.

개성 넘치는 액세서리 숍과 옷 가게를 구경하다 쉬고 싶어서 J.M. Reidy's 카페에 들어가 맛있어 보이는 타르트와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겸 펍으로 운영되는 곳인지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고, 가게의 역사가 느껴지는 엔틱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가게 분위기도 좋았지만 킬라니의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싶어 가게 밖 노상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 계획 없이 온 도시에서 우연히 마음에 든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게 여행의 본질일지도...
계획되지 않은 일을 변수나 위기라고만 생각해 가급적 계획을 짜서 변수를 피하려 했고, 변수가 생기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었는데 이런 우연한 만남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계획하지 않았기에 더 큰 기쁨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내게 필요했던 건 이런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내 영혼에 상처를 줄 자극을 피하고 안전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무해하고 건강한 자극과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빛깔과 온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며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

경유지인 이곳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진정한 여유를 느꼈다. 이 시간을 느끼고 경험한 것만으로도 가치 있고 충만한 하루였다.

다시 떠나야지. 또 무엇을 만날지 모르니까...